오늘 목욕 후에 달콩이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내 마음도 쿵 내려앉았다. 9살 먹은 우리 집 강아지 달콩이는 한 살 때 뇌수막염을 앓아서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를 잘 못 쓴다. 갑자기 주저앉으니 혹시 또 그때처럼 못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해서 심장이 쿵 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털을 말리고 나서는 주섬주섬 일어나서 간식을 달라고 보챘다. 오늘 산책 때 웬일로 오래 걷는다 했더니 무리했던 모양이다. 지쳐서 졸고 있는 달콩이를 보니, 언제 이렇게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나 싶다.
달콩이를 처음 데리고 온 것은 9년 전 어느 봄이었다. 강아지를 데리고 오자는 의견을 낸 건 나였다. 그때 나는 수원 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잠시간의 요양을 하고 있었다. 여러 모로 상태가 안 좋았던 그때의 나는 외로움을 달랠만한 존재가 집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강아지를 데려 오자, 였는데 문제는 부모님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늦둥이 남동생들을 이용했다. 남동생들에게 강아지 사진을 매일 보여주며 키우고 싶지 않냐고 꼬드기니 며칠 안 가 부모님께 조르기 시작했고 부모님은 그 성화에 못 이겨 우리를 데리고 애견샵으로 갔다. 그곳에서 달콩이를 만났다. 이미 4개월이 되어 분양될 시기를 놓친 아이. 4개월 된 아기 달콩이는 그렇게 우리 집에 왔다.
사실 강아지를 데려올 때 이렇게 데려오는 건 좀 아니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첫 번 째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데려온 것. 가족 구성원을 하나 늘리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전 구성원이 적어도 반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애견샵을 이용한 것. 세상에 인간의 필요 때문에 태어났다가 버려지는 강아지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만약 강아지를 한 마리 더 키운다면 유기견 센터를 이용할 것이다. 셋째는 ‘내가 외로워서’ 강아지를 키우려 한 것. 키워보니 이 아이는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지만, 또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이 아이가 외롭지 않도록 해 줘야 했다. 강아지는 십몇 년을 살다 간다. 그 기간 동안 책임질 수 없다면 키우지 않는 게 맞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혼자 살면서 달콩이를 키울 수 없어 부모님 집에 두고 온 나에게 달콩이는 항상 마음의 짐이다. 내가 데리고 오자고 해 놓고. 가족들에게도 달콩이에게도 미안하다. (사실 달콩이는 엄마를 더 좋아해서 지금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애견 돌보기 책도 읽고, 인터넷에서 정보도 찾아보면서 달콩이를 맞이했다.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달콩이를 꼭 거실에서 혼자 재우려고 했다. 낯선 곳에서 혼자 자기엔 너무 아기였던 달콩이는 거실에서 혼자 낑낑 울어댔다. 그 소리에 마음이 약해진 나는 내 침대 옆으로 방석을 옮겨 주었다. 그래도 침대에는 올리지 말아야지. 무슨 서열이 어쩌고 된다더라 하면서 침대는 허락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지만 며칠 못 가 무너졌다. 달콩이는 너무 귀여웠다. 실내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건 처음이라 모든 게 신기했다. 한동안은 달콩이도 우리가 어색했는지, 밖에 나갔다 들어가도 딱히 반겨주지 않았다. 개껌 먹는 걸 구경하고 있으면 슬그머니 다른 곳에 가서 먹기도 했다. 가끔은 현관문을 멍하니 쳐다봤다. 아마 자기가 언젠가 다시 애견샵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우리가 나갔다 들어오면 꼬리를 흔들고 밥을 달라 보채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을 알콩달콩 같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데, 엄마가 얘 좀 보라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달콩이가 나에게로 걸어오려 하는데 두 걸음마다 픽 픽 쓰러졌다. 처음에는 심각하다는 생각보다 웃겨서 왜 그러냐고 웃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 달콩이는 아예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달콩이의 몸이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일요일이라 문을 연 병원이 얼마 없어서, 우리는 인터넷에 정보를 찾아 겨우 한 병원을 방문했다. 몇 가지 검사를 해 보더니 일단 주사와 약을 처방해 주고, 내일 큰 병원을 가보라 했다. 달콩이는 다음 날에도 일어나지 못했다. 다음 날, 지역에서 가장 큰 병원으로 달콩이를 데려갔다. 온갖 사진을 찍고 온갖 검사를 다 했다. 그리고는 뇌수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뇌의 염증 때문에 몸이 굳은 것이라고 했다. 달콩이는 며칠간 입원을 했다. 나는 매일 같이 울었다. 달콩이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고작 1년 같이 살았을 뿐인데 정이 너무 들었다. 며칠 후 달콩이를 퇴원시키러 갔을 때, 달콩이는 나를 보고 엉엉 울었다. 케이지에 갇혀 얼마나 갑갑했을지, 나도 달콩이를 꺼내면서 엉엉 울었다. 일단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집에서 약을 먹여 보고 반응이 있으면 낫는 것이고 반응이 없으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들었다. 달콩이의 네 다리는 아직도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달콩이는 계속 배변패드 위에서 생활해야 했다. 하지만 소변을 보면 우리가 몸을 일으켜 소변이 닿지 않게 해 주었다. 화장실에 가서 눠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대소변을 볼 때는 늘 울었다. 그렇게 달콩이의 투병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달콩이가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 국비지원으로 학원을 다니고 있었고, 엄마가 출근하시면 내가 바로 학원을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학원을 다니는 시간 외에는 온통 달콩이를 돌보는 데 썼다. 답답할까 싶어서 배변패드 그대로 감싸 안고 산책을 하기도 했다. 집 안에서도 거실 창문 밖을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그때 기억 때문인지 달콩이는 아직도 창 밖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한 번은 엄마가 일찍 출근하셔야 해서 달콩이가 한두 시간 정도를 혼자 있었던 적이 있다. 학원을 마치자마자 집으로 갔는데, 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달콩이를 보고 엉엉 울고 말았다. 누운 채로 몸을 끌고 혼자 화장실을 가려다가 중간에 소변을 보고 만 것이다. 달콩이는 TV 앞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소변이 묻은 채로 나를 보며 울었다. 나도 그 모습을 보며 울었다. 소변이 묻은 달콩이를 씻기면서 제발 달콩이가 낫기만을 바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달콩이가 밥을 굉장히 잘 먹었다는 것이다. 밥을 먹고 물도 먹는 걸 보면 이 아이가 죽을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위안을 했다. 그렇게 몇 주를 병원에서 알려 준 다리 운동도 하고, 신경이 돌아왔는지 테스트도 하면서 보냈다. 대소변 보는 것도 익숙해져 달콩이도 울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 가족들이 모여 TV를 보는데 갑자기 달콩이가 네 다리로 일어서는 것이다. 그리고는 한 걸음 한걸음을 걷더니 이내 폴짝 뛰기 시작했다. 마치 갓 태어난 노루처럼. 우리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웃었다. 그렇게 달콩이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았다. 하지만 그때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오른쪽 앞다리와 뒷다리를 잘 쓰지 못한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가 이제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어서, 나가면 많이들 물어 온다. 다리를 다쳤냐고. 뇌수막염 후유증이라고 하기에도 어쩐지 구구절절해서 그냥 네, 하고 만다.
벌써 9년이다. 달콩이가 우리 식구로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스물넷이었고, 달콩이가 하늘나라로 갈 때쯤이면 나이가 마흔이 되었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머나먼 나이처럼 느껴졌는데 지금은 7년 후의 가까운 미래가 되었다. 혼자 사는 집으로 돌아와 달콩이의 안부를 물으니 잘 먹고 잘 자고 있다는 답이 왔다. 다행이다. 오늘처럼 갑자기 아프거나 하는 날이면 더욱 달콩이한테 잘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마음 같아서는 내 수명의 반을 떼어 나눠 가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잘 하자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