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22 - 그야말로 일기

by 백홍시

열어 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끝이 쌀쌀하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내 맨살에 살짝 닭살이 돋았다. 나는 바람 드는 창문 앞에서 수건을 갰다. 내 수건은 총 12개. 혼자 살면서 부족하지 않은 개수인데, 여름에는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는 탓에 늘 부족하게 느껴졌다. ‘찬 바람이 부는 것을 보니 이제는 수건이 부족한 날들이 다 지났네.’ 생각했다. 언제 또 이렇게 한 계절이 간 걸까. 계절의 끝은 늘 쓸쓸하다.


수건을 다 개어 수납장에 넣으러 가다 보니 온 집안에 책이 널브러져 있다. 몇 권인가 세어 보니 무려 8권. 모두 읽다가 만 책이다. 이렇게 읽다가 만 채로 올여름이 끝난다니 마음이 찝찝해졌다. 수납장에 수건을 넣어 두고 뒹굴고 있는 책 중에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제목은 <개떡 같은 기분에서 벗어나는 법>. 기분이 개떡 같을 때 샀다가 방치해 둔 책이다. 옆에 있는 책의 제목은 <정말 하고 싶은데 너무 하기 싫어>. 요즘의 내 마음을 너무 잘 대변하고 있는 탁월한 제목에 이끌려 산 책이다. 괜히 한 번 펼쳐 봤지만 집중이 안 돼 1분 만에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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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안 읽히고 TV도 보기 싫어 노트북을 켜고 브런치에 접속했다. 브런치 구독자가 꽤 늘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브런치북’이 새로 도입되면서 내가 이전에 엮어두었던 ‘브런치북’이 독자들에게 많이 소개가 된 모양이다. 브런치에서 오래 활동하다 보니 새로운 작가들에 밀려 고인 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새 독자들이 많이 유입되니 기분이 새로웠다. 이 기회를 타고 얼른 뭔가를 쓰고 그려서 브런치북으로 엮어보자 싶은데 안타깝게도 요즘은 내 안에서 뭔가가 나오지를 않는다. 슬럼프인가. 이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았는데 슬럼프가 와도 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2주가 다 되도록 브런치에 업로드도 하지 않았다. 사실 글을 쓰려고 시도는 몇 번 했지만, 몇 줄 못 쓰고 포기하고 말았다. ‘우울한 얘기 쓰지 말아야지.’, ‘SNS처럼 쓰지 말아야지.’ 하다 보니 글을 쓸 때마다 제동이 걸린다. 바탕화면 ‘새 만화’ 폴더에는 완성하지 못한 조각 만화들이 몇 개 뒹굴고 있다.


생각해 보니 얼마 전에 오랜만에 완독 한 책이 하나 있긴 있다. 출판사 대표가 쓴 책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출판사에 원고를 투고할 때 ‘이렇게 하지 마라.’ 모음집이었다. 별생각 없이 봤는데 이럴 수가, 거기에 나온 ‘이렇게 쓰지 마라.’가 모두 내 글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저 감정을 토해 놓은 글, 주제가 아닌 ‘나’를 주인공으로 쓴 글. 그런 글이 바로 내 글이다. 왜 내 글이 상품성이 없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어 유용했다. 그리고 조금 낙담했다. 낙담했단 소린 쓰고 싶지 않은데 사실은 사실이니.


아무튼 이 책은 참 유용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더욱 제동이 걸려 버렸다. 굳이 출판하려 쓰는 글은 아닐지라도, 연습 삼아 쓰는 글이라도 출판할만한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나 보다. 글을 쓸 때마다 ‘이건 그냥 SNS에나 올릴 일기가 아닐까.’, ‘그저 감정의 토사물이 아닐까.’하는 마음이 들어 자꾸만 멈추게 된다. 안 그래도 글 쓸 거리도 없는데 어쩌다 글을 써도 제동이 마구 걸린다. 글도 그림도 못 쓰게 되면 안 되는데. 그러면 정말 나한테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면 정말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될지도 모르는데. 조바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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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라디오가 할 시간이 되어 라디오를 켜고 침대 위에 앉았다. 불어오는 바람 끝이 쓸쓸하다. 계절의 끝 중에 가장 쓸쓸한 것은 아마 여름의 끝일 것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름이지만 어쩐지 여름의 끝을 붙잡고 놓지 않고 싶다. 여름이 지나면 올해의 절정도 지나 버릴까 봐. 가을이 오면, 곧 해가 저물어 버리면, 마음에 제동이 걸린 채로 또 나이만 먹어 버릴까 봐. 불안해서 개떡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여름의 냄새가 아직 남아있다. 그래. 여름이 아직 지나지 않았다고 치자. 그리고 여름이 끝나기 전에 제동 걸린 마음을 풀어야지. 그 마음을 풀어 깨끗이 씻어 조금 남은 여름 볕에 말려야지. 그리고 다시 곱게 개어 글과 그림에다 넣을 것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 진짜 여름이 가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하다가 추워서 창문을 닫아 버린 밤. 9월의 첫날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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