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40 - 다 알면서

by 백홍시

재작년에 내가 노르웨이에 다녀왔잖아.
그때 피오르 투어 크루즈를 예약한 날이 있었는데, 그 날 아침에 눈이 엄청 오는 거야.
하늘은 말할 것도 없이 흐리고, 어찌나 눈이 쏟아지던지 몇 미터 앞조차도 부옇게 보일 정도였지.
당연히 크루즈는 취소될 거라 생각하고 일단 승선장에 갔는데, 출발을 한다더라고?
이 눈발에 무슨?이라고 생각했지만, 환불받을 만큼 영어를 잘 하진 못 하니까 일단 탔어.


출발 전에 선장님이 방송을 하시는데, 오늘 날씨가 퍼펙트해서 멋진 관광이 될 거래.
코웃음을 치며 속으로, '아이고, 아까운 내 돈!'만 외쳐댔지.
그런데 출발하고 한 5분 됐나? 거짓말처럼 눈이 뚝 그치더라고.
한 20분쯤 지나니까 저기 멀리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어찌나 신기하던지.

그때부터는 갑판 위로 올라가서 경치를 감상하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1분마다 하늘이 맑아지고 물은 잔잔해지고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는 거야.
조금 전까지 돈 생각만 하던 나는 어디 가고, 놀라서 와우만 외쳤지.
결론부터 말하면 정말 퍼펙트하고 멋진 관광이었어.

그래서 무슨 얘기냐고?
그러니까, 내가 그때 날씨에 지레 겁먹고 환불을 받았으면 어쩔 뻔했겠냐는 얘기야.
지금도 북유럽 여행을 떠올릴 때 오로라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순간인데, 그 순간을 놓쳤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고.
영어를 잘 못 해서 정말 다행이지 뭐야.



우리가 삶을 살 때도 그.

기회가 와도 잡지 못 할 때가 많잖아. 불안해서.
함박눈 때문에 앞이 안보이니까 불안해서 당장 눈앞의 돈만 생각하게 되기도 하잖아.
근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출발하면 막상 전혀 다른 하늘이 펼쳐질 수도 있겠더라고.
선장님은 그걸 알았던 거야.
노르웨이 날씨는 정말로 변덕스럽거든.
믿고 있었던 거지.

조금만 가면 파란 하늘이 나올 거라는 걸.

그러니까 우리 이제 좀 멀리 보고 출발해 보자고.
눈앞이 안 보이면 하늘을 보면 되잖아.
그럼 저 멀리 파란 하늘이 점처럼 보일지도 몰라.
하늘을 봐도 끝없이 흐리기만 하다고?
에이. 알잖아. 구름 뒤에 하늘 있는 거. 그것도 아주 높고 파란.
안 보인다고 모른 척할 거야?


다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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