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

잡문 48 - 꿀

by 백홍시

고대하던 유럽에 첫발을 내디뎠다. 깊은 밤이었다.
공항은 깔끔했고, 삭막했고, 주변은 고요했다.
내 손에 들린 커다란 캐리어와 보스턴백은 키가 내 가슴께까지나 왔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동양인이라고는 나뿐이었다.
이 먼 곳까지 왔다는 것이 실감 나면서 완연한 혼자라는 두려움에 머리가 쭈뼛했다.
호텔까지는 도보로 200미터 남짓.
캐리어에 두려움과 긴장을 잔뜩 넣어 털털대며 걸었다.

호텔 앞에 도착하니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 있었다.
입구까지 계단을 10칸 정도 올라야 했던 것이다.
계단을 한번, 캐리어를 한번 바라보는 순간 계단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남성 두 분이 달려오셨다.
내 캐리어를 들어 주려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네네. 그럼요. 맘껏 도와주시고요.
저는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마음속)

나를 보자마자 달려오는 속도는 마치 불에 뛰어드는 소방관의 그것이었다.
도와드려도 되냐는, 매너의 끝판왕 멘트를 하며 발사했던 눈빛은 마치 디즈니 만화에서나 보던 왕자님의 그것이었다.
아, 두려움이고 나발이고 비켜 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체크인을 하자마자 커튼을 젖혔다.
삭막한 풍경. 어느 도시나 공항 근처는 그러할 것이다.
씻기 위해 짐을 푸는데 방금 전의 매너남들이 떠올랐다.
웃음이 절로 나고 마음이 포근해졌다.
공항에서의 두려움과 긴장은 어디 가고, 캐리어에는 설렘만 잔뜩 들어 있었다.


왕자님들아 잘 있니? 여전히 친절한지.

이후로도 수많은 친절을 경험했다.
한 번은 전철을 탔는데, 시외까지 가는 노선이라 그런지 전철 중간 복도에 접이식 간이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영화관 의자처럼 내려서 펴는 것 말이다.
자리가 없길래 복도로 나가 두리번거리니, 나를 발견한 미청년이 재빨리 옆자리 의자를 내리며 말했다.

"여기, 당신 자리예요.(싱그러운 미소는 덤)"

이 청년 좀 보게. 입에 꿀단지를 장착하고 다니시네.
이때는 이미 여행 15일 차쯤 되어서, 나도 여유 있게 웃으며 "Thank you."하고 앉았다.

스윗함은 많은 것을 이긴다.
달콤한 한마디는 두려움을 없애고 에너지를 넣어주고, 많은 것들을 녹아내리게 만든다.
나쁜 남자가 한창 유행일 때도 나는 그것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드라마의 강마에 캐릭터는 매력적이긴 했지만)
착하고 스윗한 게 최고야! 짜릿해! 늘 새로워!
'내 귀에 캔디' 같은 그런 말, 나도 누군가에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달콤한 말을 하는 건 상상만 해도 왜 이렇게 소름이 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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