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

잡문 52 - 다 싫다

by 백홍시

아침에 온수가 안 나와서 애를 먹었다.
찬물 샤워를 못 하는 체질이라 어떻게든 온수를 틀어보려 했지만 냉수만 콸콸.
결국 찬물 샤워는 찬물 샤워대로 하고 회사에는 5분 지각을 하고 말았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은데 오늘은 또 하루 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 짜증 난다.

회사에 있는 시간은 총 10시간 35분.
출퇴근 시간까지 합치면 12시간.
아니, 내 한 몸 먹고사는데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건데, 대체.
퇴근길에는 12시간 후에 또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한숨이 났다.
잠자는 시간을 빼면 남는 시간은 고작 너덧 시간 남짓.
나는 그 시간을 쪼개 집안일도 해야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신경 써야 하고, 몸을 위한 휴식 시간도 가져야 하고, 마음을 위한 활동들도 해야 한다.
이 황금 같은 시간들을 회사에 저만큼이나 투자하고 있다니.
그 시간 값만 해도, 이미 내 월급만치 일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부터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있을까 보다.)


먹고살기 바빠서 다른 걸 못할 때 너무 짜증이 난다.


아, 다 싫다.
안 먹고 안 살고 싶다!


앗. 방금 엄마한테 가상 등짝 스매싱 당한 것 같은데 착각인가?
몰라. 나이 똥구멍으로 먹고 철없는 걸 어떡해.
아무리 생각해도 '먹고만 사는 인생' 따위는 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내 심정인 걸 어떡하냐고!
좀 적절히 시간을 투자하면서 나의 육체도 책임지고, 마음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컵라면을 준비하다가 물 데우는 것을 깜빡해, 컵라면에 찬물을 붓고 말았다.


아...........
더 이상은 못 참아! 다 꺼져!!


컵라면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울면서 라면 조각을 줍고 있을 내가 떠올라 그러지는 못 했다.
컵라면은 내버려 두고 편의점 김밥을 데우지도 않은 채 질겅질겅 씹었다.
밥알들은 다 굳어 씹히지도 않는다.

차갑다.
화난다.
슬프다.

다 모르겠고 일단 온수 문제나 해결해야겠다.
내일도 찬물을 맞으면 내 마음은 정말 딱딱하게 굳어버릴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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