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에 대한 재미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인공지능에게 강아지와 고양이의 차이점을 인식시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 둘의 차이를 말로 설명하기엔 굉장히 애매하다. 나도 그걸 듣고는, 무엇을 기준으로 강아지와 고양이를 구분지어야 할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 그럼 인공지능에게 강아지와 고양이를 어떻게 설명하느냐면, 그냥 이미지를 잔뜩 넣어준다고 한다. 강아지 이미지를 잔뜩 넣어주고 이것은 '강아지'. 고양이 사진을 잔뜩 넣어주고 이것은 '고양이'. 뭐 이런 식인가 보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 인공지능이 둘의 차이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정립하는 모양이다. 참 신기하다.
이걸 듣고서 나는 문득 대상 영속성이 생각났다. 대상 영속성은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능력이다. 대상 영속성 개념이 생기기 전까지, 신생아들은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까꿍 놀이를 좋아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눈에는 사라진 것이 다시 나타나는 마술과도 같겠지. 으이그. 귀여운 것들.
아무튼 인공지능이 강아지 개념을 익히는 것이나 신생아들이 대상 영속성을 획득하는 것에는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머릿속에 있는 '사물의 이미지'다.
예를 들어 새로운 사람을 처음 만난 날, 집에 와서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해도 거의 떠올리지 못한다. 아직 그 사람의 이미지가 내 안에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이미지는 '만날 때만' 존재하게 된다. 그 이미지가 마음속에 어렴풋이 생길 무렵, 다른 이미지의 옷을 입거나 머리 스타일을 바꾸면 또 다른 사람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미지들이 마구 뒤섞이고 흔들린다. 그런 과정을 거치고 거쳐서 드디어 그 사람의 이미지가 내 안에 콕 박히면, 그때부터는 무얼 해도 그건 그 사람이다.
이렇게 생기는 마음속 이미지는 어쩌면 그 사람의 존재 그대로를 담아내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지를 만드는 것은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다. 그 사람의 존재가 내 눈과 생각을 통해 재해석되어 마음속에 심상으로 맺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스럽게, 미운 사람은 밉게 맺힌다.
일전에 만화로도 그린 적이 있는 한 실험을 다시금 인용해 본다. 실험자는 두 사람.실험자들은 어느 한 사람을 뜯어보며 생김새를 말로 묘사해야 한다.실험자 중 한 명은 묘사 대상의 연인, 한 명은 일면식도 없는 타인이다. 결과는?
뻔하지 뭐.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연인이 묘사한 모습과 완전한 타인이 묘사한 모습은 꽤 많은 차이가 있었다.심한 경우에는 거의 다른 사람을 묘사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연인의 눈에는 그 사람의 사랑스러운 부분이 먼저 보였고, 타인의 눈에는 그 사람의 특징적인 부분이 먼저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이 단계까지 왔다면, 미우나 고우나 그 사람은 '내 삶에 존재하는 사람'이 된다. 한두 번 만났거나 또는 관심이 없어서 조각들로만 기억되는 타인들과는 조금 다른 성질의 타인이 되는 것이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사람. 멀리 있어도 들리는 사람. 텍스트만 읽어도 표정이 읽히고 제스처가 영상처럼 재생되는 사람이 된다.
대상 영속성을 획득한 영아처럼, 그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 마음속에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강아지와 고양이의 차이를 배운 인공지능처럼,그 사람과 다른 타인과의 차이를 내 안에서 명확히 정립하게 된다.
그는 이제 나에게 뭉뚱그려진 군중이 아닌, 독립된 하나의 존재가 된다.
아무리 똑같은 일란성쌍둥이라도 부모는 그 둘을 구분한다. 부모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각자의 이미지로 콕 박혀 있기 때문에. 저 멀리 눈코입도 안 보이지만 나는 그를 알아본다. 그의 모든 것이 이제 내 마음속에서 하나의 심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타인이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은 이렇게도 신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