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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홍시 Dec 20. 2020

잡문 98 - 맛없는 일상

어쩌다 이런 기분이 매일 지속되게 되었는지 나도 모르겠다.

요즘 나는 삶의 모든 것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나에게 재미를 주던 것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작가, 좋아하는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재미를 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나는 퇴근 후에 TV를 켰다가 끄고, 라디오를 켰다가 끄고, 노래를 틀었다가 몇 소절 듣지 못하고 끄고, 책을 들었다가 덮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가 닫는다.

즐겨 듣던 음악은 소음이요, 좋아했던 책은 그저 검은 활자다.

주말에는 글을 쓰려 모니터 앞에 앉았다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본다.

그림이라도 그려 보자며 프로그램을 켰다가 펜만 잡고 또 허공만 바라본다.

좋아했던 음식을 배달시켜 보지만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다지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몇 술 떠 본다. 음, 맛있네.

음식의 맛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저 나에게서 식도락의 재미가 사라진 것 같을 뿐이다.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해 온다.

뚜껑을 열자 향긋한 커피 향이 방안에 퍼진다.

한 모금 마셔 보니 향이 참 좋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정말 맛있는 커피!

아, 지금이야. 행복한 순간!

그러나 이런, 이전에 느꼈던 그 행복감이 전혀 없다.

나는 갑자기 냉철한 커피 전문가라도 된 양, '음, 아주 잘 내린 핸드드립 커피야.'라고 생각할 뿐이다.

이런 글을 쓰고 있자니 예전에 내가 쓴 글이 생각난다.

'잡문 4'에서도 이런 마음의 상태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노래도 만들었었다.

아무에게도 들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멜로디는 나만 알고 있지만.

행복한 moment
(백홍시 작사, 작곡)

내 맘대로 꾸민 집에 앉아
좋아하는 빗소리 들으며
아, 지금이 바로 행복해야 하는 순간
아, 지금이 내가 좋아했던 그 moment

하지만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아
뭘 해도 도대체 즐겁지가 않아
대체 무슨 일인 걸까 내 마음은
어디 한쪽 구석이 고장 난 걸까

이 노래를 만들고 1년 반이 지난 지금, 나에게 또다시 이런 시기가 오고 말았다.

물론 삶이 항상 재미있고 행복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면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들, 그것들이 몽땅 사라지는 시기가 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음이 무언가로 똘똘 감싸져, 어떤 자극도 통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

퇴근길마저 발길이 무겁고, 월급날마저 마음이 풍요롭지 않은 기분.

이런 시기는 왜 찾아오는 것인지.


나는 그냥, 맛있는 걸 먹으면 꿀꿀했던 기분이 전환되었으면 좋겠다.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면 지저분했던 마음이 정돈되었으면 좋겠다.

추운 겨울, 잠시 느껴지는 낮의 햇살이 따뜻해서 행복감이 잠시나마 슬며시 피어오르면 좋겠다.

어쩌다 보게 된 강연 영상에 가슴이 찡했으면 좋겠다.

별 거 아닌 귀여운 사진들을 보고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늦잠을 잔 주말 아침에는 여유롭고 행복한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뿐이다.


분명 그런 날들이 있었다.

그 사실이 지금 나에게는 최소한의 희망.

시간은 흐르고 많은 것들은 변하고 또 지나간다.

음악이 소음으로 들리지 않는 날, 시답잖은 예능프로에 웃을 수 있는 날, 흥미로운 책 내용에 풍덩 빠져 한참을 즐겁게 골몰하는 날, 주말 저녁에 먹는 맛있는 음식 하나로 한주의 피로가 사라지는 날.

딱딱한 껍질을 벗은 마음이 온갖 자극에 변하고 휘어지는 나날.

그런 날이 또다시 오겠지.

그러면 나는 그 마음을 가지고 다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테다.

쥐어짜지 않아도 알아서 넘쳐흐르는 다채로운 마음을 가지고.


그런 희망으로 이번 주말도 흘려보낸다.

별 볼 일 없는 글이라도 써서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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