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의 새로운 삶, 한 달마다 새 집 살기
너네 집은 어디야?
풋내 쿨쿨 나던 대학 새내기 시절 같은 과 여자 동기가 내게 물었다.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삐질삐질 진땀 나듯 "서울 OO동이야" 얼버무렸던 기억이 난다. 달콤한 향수를 뿌린 예쁘장한 외모의 그녀가 여사친에서 여친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잘 보이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뭐라 답해야 할지 알쏭달쏭하다.
내게 집이란 그랬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인천에서 자랐지만 초등학교만 네 군데를 다닐 만큼 이사가 잦았다. 아예 땅끝 지방으로 아버지가 발령받자 삼촌댁에서 살기도 했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서울에서 형, 누나와 살았다. 그 역시 안정되지 않았다. 셋이 살다가 형과 살다가 누나와 살다가... 내게 집이란 온전치 않았고 늘 피난민처럼 짐을 싸 두어야 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그나마 미세하게 존재하던 공간으로서의 집은 소멸했다. 누나는 시집을 갔고 형은 군대를 갔다. 지방에 계신 부모님 집을 '집'이라 부르긴 했으나 나의 체취가 닿지 않은 낯선 공간을 마음까지 내 '집'이라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역마살이 낀 듯 늘 떠돌아다니는 인생이 고달팠는지 직장을 얻자마자 이른 결혼을 했다. 하루빨리 내 가족을 이루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었다.
@결혼 후 다시 서울로 와 7년간 살았던 집과 골목은 이제 재개발 바람에 스르륵 사라졌다.
얄팍한 살림의 소시민이 그렇듯 여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전셋값에 맞춰 떠돌고 있지만 늘 마음속 한 켠에는 네 식구가 함께 살아갈 집을 짓고 있다. 아일랜드 식탁 하나 만에서 넓은 주방으로, 소박한 텃밭은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마당으로 소박한 집은 어느덧 넓고 크게 변해갔다. "그래도 집은 있어야지" 어른들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인지 그 어른들과 똑같이 번듯한 집에 대한 열망은 욕심으로 커져갔다. 무엇이 우리를 집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러다 그 집착을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버리게 된 계기가 생겼는데 멀지 않은 최근의 일이다. 방랑벽은 사라지지 않고 나를 해외까지 보냈다. 적지 않게 해외출장을 다니긴 했지만 한 번도 외국에서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그것도 생전 가본 적 없는 중국이라니. 나와 반대로 늘 해외에서 살기를 원했던 아내도 중국이란 말에 달가워하지 않았다.
선택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오랜 고심 끝에 아직 도전을 두려워할 나이가 아니란 생각에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평생 살 것만 같던 고국을 떠나 베이징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회사의 배려로 처음 2주는 호텔에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2주가 지나서는 다시 집! 집을 찾아야 했다. 가족이 살기에 넉넉한 공간, 아이 학교와 멀지 않은 거리, 그러면서 지하철 역과 가까워 출퇴근이 용이한 집. 적응하기도 바쁜데 생경한 환경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찾으려니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베이징 시내는 살인적이라 알고 있던 서울 집값보다 비쌌다. 발품을 팔수록 마음은 조급해졌다.
@베이징의 아파트는 가구가 있는지 어떤 가구인지 조명은 밝은 지 온돌시스템인지 체크할게 너무 많다.
그러다 중국에서 사드가 터졌다. 한한령에 이어 일부 한국기업이 퇴출되며 사드 보복이 이어졌다. 한국발 중국으로 오는 비행기가 텅텅 비고 여파는 나 역시 피할 수 없었다. 비자가 연기되고 안전을 고려해 가족들도 좀 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뜻하지 않게 기러기가 되었지만 전화위복이 되었다. 계속해서 호텔에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아파트를 구해야 했는데 북경에서 집을 계약하려면 최소 6개월에서 1년 단위로 해야 한단다. 그때 말로만 듣던 공유경제 플랫폼 에어비앤비(Airbnb)가 떠올랐다. 한 달에 한 도시를 여행하며 세계일주 했다는 부부가 이용했다는 그것. 지난해 일본 여행에서 시도하려다 못했던 그것을 한번 이용해 보기로 했다.
카드 등록이 제대로 되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까다로운 에어비앤비의 가입절차를 통과(?)하고 베이징TV(BTV)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를 얻었다. 체크인하던 날 낡고 지저분한 복도와 엘리베이터에 경악해 주소를 몇 번이나 확인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호스트의 강력한 환불정책 덕분에 취소하지 못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한 달간 입주하게 되었지만 편히 발 뻗을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에 지금은 만족하게 되었다. 주위에 물어보니 중국은 기본 시멘트 공사만 끝나면 나머지 인테리어는 입주자의 몫이라 한다. 그래서 복도와 같이 공공으로 이용하는 공간은 관리되지 않은 채 방치된 경우가 많단다. 밤에 다니면 귀신 나올 포스다 ㅜㅜ
이번엔 어디서 한 달을 살아볼까? 이제는 콧노래 부르며 여행 가듯 '집'을 고르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집에 대한 스트레스는 어느덧 사라진 것 같다. 그래~ 이렇게 살아보는 게 낯선 도시를 빨리 알아가는 좋은 방법이란 긍정의 에너지가 솟아났다. 북경의 집은 대부분 가구가 갖추어져 있어 그야말로 옷가지를 갖춘 트렁크만 끌면 이사도 편리하다.
그래서 집이 어디예요?
누군가 내게 집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이젠 고민 없이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없어요! 한 달에 한 번 여행 다니면서 살아요!"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질문 뒤에 이어질 '몇 평 아파트예요', '전세 얼마예요', '학군은 어때요' 이런 따분한 대화 대신 "부러워요"라는 한마디 말을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