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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프 Nov 20. 2021

최대한의 나

다른 누구가 되는 게 아닌. 

      

친한 친구와 함께 그의 지인인 A의 작업실에 놀러 갔다. A의 취미는 사주를 보는 건데 내 사주도 봐준다고 했다. 난 좋다며 A에게 냉큼 내 생년월일을 불러주었다. 내 사주는 어떨지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시에 양심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난 마음속으로 말했다. “하나님, 한 번만요. 그냥 취미인 친구가 재미로 봐준다고 하는 거니까요.”      


내 생년월일을 들은 A는 말했다. “고생을 많이 하는 사주네요. 역경이 오면 자꾸 헤쳐나가서 또 역경이 와요. 이런 건 바꿀 수 없어요. 흔히 말하는 팔자라는 게 이런 거죠.”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고생을 많이 한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최근 3년간 많이 힘들었는데 내년부터는 나아질 거예요.”

난 더 고개를 갸우뚱한다. 최근 3년간 힘들었다고? 아닌데. 오히려 최근 3년간 글을 쓰게 돼서 더 나아진걸.      

A는 나의 표정을 보더니 생년월일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맞다고 하니 A는 다시 내 사주에 대해 말한다. 나도 모르는 사주 용어를 말하며 먼저 고개를 끄덕인다. A가 “오!” 또는 “아.” 혹은 “어머.” 등의 반응을 보이면 나와 내 친구는 “왜요? 뭔데요?”하고 A 쪽으로 고개를 길게 뽑고 설명을 기다린다. 그러면 A는 천천히 풀이해 준다.      


맞는 얘기도 많았다. 살림을 잘못해 집에 있기보다는 나가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 재물에 욕심이 별로 없어 돈은 딱 쓸 만큼만 있으면 된다는 말. 그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말은 ‘토(土) 기운이 심하게 강해 쉽게 우울해진다는 것이다. 그 마음을 자꾸 덮어 겉으로는 우울한 티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A의 말을 들은 친구는 의아하다는 듯 나에게 물었다. 


“너 그런 성격이었어? 우울하거나 슬픈 거 왜 말 안 했어?”

“뭘 말해. 그리고 사실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많아.”

A는 내 대답에 맞장구를 친다. 

“맞아요, 그래서 미치기 쉬운 사주예요.”     


A는 장난으로 내 친구에게 날 조심하라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미칠 수도 있겠다 느꼈던 일이 퍼뜩 떠올랐다. 27살 겨울, 결혼이 잘 안 됐을 때. 결혼식장 예약을 취소하고 이모가 미리 보내온 축의금 5백만 원은 어떻게 하나 -펀드에 넣었었다- 고민하다 속이 상해 눈물이 났다. 며칠을 울다 스스로 멘털을 붙잡기 위해 택한 방법은 예능 프로그램 보기. 그렇게라도 웃지 않으면 마음 가득 출렁대는 슬픔이 자꾸 눈물 구멍으로 넘쳐 나왔다. 안방에 있는 조그마한 TV를 틀어놓고 혼자 예능을 보며 깔깔 울었다. 이러다 내가 미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이 내 생각을 장악하는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이성으로 우울을 붙잡으려고 하면 우울은 어림도 없다는 듯 금세 이불 펼치듯 내 생각 위로 휙 펼쳐졌다. 난 그 기운에서 벗어나려고 습관적으로 나보다 힘든 사람을 찾았다. 그래, 가족이 죽은 사람은 얼마나 힘들겠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은 또 어떻고.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혼자 있을 때면 평생 사랑받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과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하는 무력감이 밀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왜인지, 내가 죽은 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됐다. 죽은 다음에 내가 믿는 신 앞에 섰을 때. 내가 믿는 신이 나에게 “넌 어떻게 살았니?”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아니, 글쎄,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 뭐예요. 너무 슬퍼서 울다가 세월이 다 지나버렸어요.”라고 말하겠지. 그런데 과연 이 일이 핑계가 될까. 이 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되는 핑계가 될 수 있을까. 신 앞에서 그렇게 말하는 나는 왠지 후회하고 있을 것 같다. 그래, 힘든 일이 있다고 모든 사람이 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진 않을 거야. 난 그 생각으로 우울의 시간에서 벗어났다. 내 죽은 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A는 계속 말한다. 난 집에 있으면 우울해지니 밖으로 나와야 한다고. 

“저 집에 있는 거 싫어해요. 집에 있으면 시간을 잘 쓰기 어렵거든요. 멍하니 TV를 볼 때가 많아서 일도 카페에서 하고 집에 잘 안 있어요.”

“어머! 그거 엄청 잘하시는 거예요. 스스로 잘 극복하고 계시네요.”     


사주를 보고 나니 미래에 대한 예측을 제외하면 애니어그램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넌 이런 기질을 타고났어. 이런 사람이야. 하고 이야기해주지만 결국은 거기까지다. 나머지는 나의 몫이다. 내가 그 기질을 철퍼덕 깔고 앉느냐 아니면 그 기질의 단점을 극복하려고 하느냐의 차이가 내 삶을 다르게 만든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나에게 일어난 일에 불평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내 길을 걷는 것.      


지금도 가끔 내가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우울하다. 경제관념도 별로 없고 주민센터에서 서류 떼는 것도, 핸드폰 가게에서 핸드폰을 개통하는 것도 병원을 알아보고 예약하는 것도 많은 에너지가 든다. 남들은 휙휙 쉽게 하는 일을 크게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먹고 해야 한다. 사실 어제도 딸 안과 예약을 변경해야 하는데 나중에, 나중에……, 하다가 결국 다음날 할 일로 넘겼다. 평소 같았으면 아. 난 왜 이럴까. 하고 자책했을 텐데 이번엔 ‘그래, 난 이런 성격이지. 그래도 다음엔 꼭 하자.’하고 알람을 맞췄다.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에 보면 이슬아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이런 말을 한다. “너는 커서 네가 될 거야. 아마도 최대한의 너일 거야.” 그 말이 오늘 나에게 와닿는다. 나는 위대한 누군가처럼 되는 게 아니라 최대한의 내가 되면 좋겠다. 내 기질을 다독이며, 포기하고 싶은 글을 포기하지 않고 쓰며 최대한의 내가 되길. 글을 마치자마자, 난 안과에 전화를 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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