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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흥만 Jan 04. 2016

순례자는 히치하이킹을 하지 않는다.

아시시 까르첼리 은둔소 가는 길 - 왜 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셨습니까?

이제 조금 아시시를 안다고 자만하고 있을 무렵, 안나는 내게 물었다.


"요셉...내일은 어디갈꺼야?

 혹시 Eremo delle Carceri 안가봤으면, 가봐.

 네가 가면 좋아할 곳이야"


난 '가볼께요'라고 말은 했지만, 딱히 땡기지는 않았다.

성당이 거기서 거기고, 성지가 거기서 거기지, 지금껏 이탈리아에서 성당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런지

그 성당이 그 성당 같고, 그 성지가 그 성지 같았다.

그러나 오랫만에 트래킹을 한다는 마음으로 아시시성 밖으로 나가보기로 하였다.


동쪽 아시시 성채 밖으로 나가는 길은 처음이라 그런지 조금 헷갈렸다.

아시시 지도를 현지 아시시에 사시는 분들에게 보여주면서 검지손가락으로 내가 가야할 곳을 가르켜도 대답하는 사람마다 다른 길을 알려줬다. 그러다 뭔가 찜찜해 다른 분에게 여쭈어보면, 다른길로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


그랬다. 길이라는 것은 한국에서나 이탈리아에서나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모두다 저마다의 길을 가고 있기에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길을 가르쳐줄리 만무했다. 그렇게 두어번 바른길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고,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니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마치 지금의 내 인생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에게 묻지 않기로 했다. 내 종이지도와 내 스마트폰의 구글맵을 양손으로 체크하면서 내 방식대로 내 길을 열고자 했다. 사실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난 서울에서 '상처받은 내면아이'라는 책을 통해 내 스스로 내 안에 아직 성장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앉아 내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발목을 잡아온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과 타인을 믿는 힘이 약하다는 거다. 따라서 내면아이를 가진 사람은 이 부분에 대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길 바란다는 저자의 권고가 담겨 있었고, 난 그 부분을 읽으며 정곡을 찔린듯 조금 놀랬었다.


이제 나는 틀린길을 알려주는 그들까지 믿어야 했다.

무엇을 믿는 일에 약한 나라지만 나는 이제 훈련이라는 마음으로 이 세상 모든이를 믿어보기로 했다.

어느덧 차도가 나왔고, 걷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모두들 보란듯이 도로를 시원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나는 혼자여서 외로웠고, 차가 없어서 서글펐다.

그러나 다행인것은 이 길이 순례길이라는 것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래 나는 지금 순례중이다.

동행도, 차도 하나도 부럽지 않다.


거친숨을 몰아시며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으니

어느새 나와 같은 순례자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아~~ 난 혼자가 아니었어.."


그리고 그 때 알게됐다. 아시시에서 관광객과 순례자를 구별하는 방법을 말이다. 순례자들은 버스나, 택시를 타지 않았다. 그들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 길을 프란치스코가 걸었던 것과 최소한 비슷하게 걷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성인께서도 그 시대 버스나 택시가 있어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이용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이후론 내가 왠지 진짜 순례자가 된듯 하여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래 나는 지금 까르첼리 은둔소로 가는 길이다. 1205~1206년 젊은 프란치스코가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 머물며 기도했다던 그 장소로 나 역시 초대되고 있었다. 묵주기도도 하고 좋은마음으로 걸으려고 했건만, 해결되지 않은 내 삶의 사건과 문제들이 스멀스멀 내 걸음들과 함께 하나, 둘 발맞춰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해발 791미터 지대에 위치한 은둔소로 가는 길 아래에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지방이 조선시대 병풍처럼 펼쳐져 있어서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이윽고 은둔소 앞에 나는 도착했다. 내 가슴에 아무 감흥도 주지 못하는 화려한 구유를 애써 외면하며 동굴속으로 들어갔다. 나 같이 큰 키가 아닌사람도 허리를 45도 이상 구부려야 다음방으로 이동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난 한 방. 그 작은방에는 작은 제대 하나와 예수님 고상만 놓여 있었다. 언제부터 내가 기도했던가. 나는 그저 제대 앞, 사람이 앉을만한 아니 어쩌면 젊은 프란치스코가 앉았을지도 모르는 평평한 평돌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한채로 제대 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난 예수님께 가슴속으로 원망도 하고, 한탄도 하며 이런저런 푸념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푸념 섞인 기도시간은 참 오랜만에 나를 깊은 침묵 안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20여분 정도 지났을까? 나는 푸념기도를 끝마치고 은둔소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아시시 전경을 찍으러 실내성당을 나온 순간 세상은 안개 천지였다.


사실, 내가 이 높은 곳에 올라온 이유는 어제 마르코가 자신의 핸드폰 사진 속 아시시 전경이 다 보이는 사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겨우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아시시의 안개현상 때문에 아시시 전경은 커녕 까르첼리 은둔소에서는 10m 전방의 사람도 식별하기 어려운 날씨가 펼쳐지고 있었다. 내게 이 곳을 추천해준 마르코를 비롯하여 안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이 안개 낀 산에 뭐 볼 게 있다고 나는 이 곳을 올라왔고 또 내려가고 있는지, 보물섬에 보물이 없다는 걸 알게된 탐험대원처럼 난 허탈해하고 있었다.


그 때즈음, 난 예수님께 한마디 했다.


"주님, 무엇때문에 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오셨습니까?"


저 말을 내뱉은 내가 짠했다. 무슨 대단한 구경을 하겠다고 돈도 없고 미래도 불확실하면서 이 이역만리 이탈리아까지 와가지고는 이러고 있는지, 무슨 대단한 순례를 하겠다고 안개낀 산을 오르고, 내리고 있는지 나는  주님께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마르코, 안나, 예수님까지 이렇게 난 모든걸 타인의 책임으로 전가했다.

선택 장애, 이것도 아마 책임지기 싫어하는 내 성향, 내 안의 상처 받은 아이 덕분에 생겼으리라.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다. 이제 내가 나를 조금씩 알게 됐고, 원하는 삶의 방향도 조금씩 설정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생에 정답이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선택하고 책임지면 되는 것을, 누구를 원망하는 삶의 태도의 다른 말은 '나는 노예요. 나는 내 인생의 선택에 책임지지 않겠소'와 같다는 것을 조금 더 깨닫게 된 날이다.


그런데 조금 더 걷다보니 안개도 걷히고 저 멀리 루카 마조레 성도 보이고, 토스카나의 대평원도 보이자 내 마음은 누그러져가고 있었다. 게다가 땀을 촉촉히 흘리니 기분도 좋아지고 있었다. 아! 그리고 내일은 아시시를 떠나야 하니 성프란치스꼬성당에서 전대사를 받아야 한다. 난 걸음을 서두르며 성프란치스꼬 성당으로 향했고, 지난 며칠간 제대로는 아니지만 틈틈히 성찰해온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프란치스꼬성인의 무덤 앞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잘 살아았다.

세상의 희비와 상관없이 잘 살아왔다.

주님을 찾았고, 사랑을 찾았고, 나를 찾아왔던 아름다운 길이었다."


고해는 성당 내 한국어가 가능한 고해소 안에서 한국어로 했다.

아마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에서 파견오신 신부님이신듯 한데 나는 아는척 하지 않고 인사하지 않고 고해에만 집중했다. 고해 후 유한한 죄인 잠벌들을 모두 사해주는 전대사를 받아 그런지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날 목욕탕을 나와 보이차를 마시는듯한 이완되는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오늘도 내게 베풀어주실 것을 다 베풀어 주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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