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좋은 어느 주말.
아내와 아이와 차를 타고 어딘가 가고 있었다. 어느덧 결혼 10년 차. 같은 대학 동기 사이였던 아내와는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불 같은 사랑을 하지도, 대학시절부터 10년을 사귀어온 전설 속의 CC도 아니었지만, 외롭고 결혼을 꿈꾸던 젊은 시절에 만나 연인이 되었고 타이밍 좋게 결혼까지 가게 되었다.
여느 평범한 부부들처럼 시답잖은 일로 자주 다투기도 하며 10년을 동지애로, 우정 같은 사랑으로 견디며 살아왔다. 결혼 초기에는 특히 고부갈등 문제 때문에 다투는 일도 많았다. 그걸 보고 자란 딸아이는 엄마, 아빠가 그래도 한때 서로 사랑했던 연인 사이였다는 사실이 못내 못 미덥고 신기하기만 한 듯했다.
뒷좌석 카시트에 앉아있던 아이가 대뜸 외쳤다.
"엄마! 오늘 밤에 같이 자면 안 돼?!!?"
"안 되지~ 특별한 날도 아닌데. 네 방에 자. 엄마는 내 남편이랑 잘 건데? 훗."
아직 아기 티가 남아 있는 여덟 살 아이는 못내 서운한 듯 입술을 삐죽 내민다.
"엄마는 아빠가 좋아? 내가 더 좋아?"
"음~~ 당연히 우리 아인이가 더 좋지! 가 아니고. 아빠도 사랑하고 우리 딸도 사랑하지! 그건 왜? 아인이가 보기엔 엄마가 아빠 안 사랑하는 거 같아? 맨날 싸워서? 크크"
"엉!! 에이~ 무슨 엄마랑 아빠가 서로 사랑한다고 그래. 으~~ 말도 안 돼"
아내는 잠시 반성하는 낯빛을 비추더니 운전중인 내 어깨에 다정한 척 손을 얹으며 더 장난스럽게 대꾸한다.
"아니야~~ 우리 사랑하는 사이야. 그러니까 결혼했지. 아인이도 낳고! 너 엄마, 아빠가 같은 대학 나온 건 알지? 그때부터 친구였어. 엄마, 아빠는 너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서로 알던 사이라구우~"
아내는 재치 있게 오늘 밤 같이 자면 안 되겠냐는 아이의 달콤한 부탁을 화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한참 동안 아이는 우리의 대학시절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아내와는 약 10년 전, 내가 29살이었을 때 사귀기 시작했다.
04학번으로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입학한 동기였던 우리는 대학시절에는 큰 접점이 없었다. 그저 저기 저 걸어가는 여러 명 중 한 명인 같은 과 친구 혹은 가끔 술자리에서 보는 조금 친한 남사친, 여사친이었다.
각자 다른 사람들과 오래 연애를 했고, 각자 친한 친구들과 무리 지어 다니며 대학생활을 보냈다.
만약 내가 고등학생 시절의 성적대로 수능을 잘 쳐서 그 학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만나지 않았을 거고, 아마도 그녀와 결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 20대 후반 즈음 어디에선가 서울에서 그녀를 만나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지만.
부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냈지만, 고등학생 때 대전으로 이사가 몇 년을 대전에서 보내면서 대학은 당연히 서울에 있는 곳으로 갈 줄 알았다. 대망의 수능을 치르던 날, 첫 과목인 언어영역을 풀면서 뭔가 잘못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직감했지만 정작 수능성적이 예상보다 더 낮게 나왔을 때엔 엄청나게 낙담하진 않았다. 같이 공부했던 소위 우수반 아이들이 SKY에 합격해서 배가 아프기도 했지만, 재수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 재수를 하면 원래 내 성적에 맞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 수도 있었겠지만, 재수학원을 다니거나 아무튼 1년을 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죽어도 싫었고, 무엇보다도 1년을 더 부모님이 계신 그 대전 모텔방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일단. 이곳을 떠나자. 수능은 일단 대학 다니면서 다시 봐도 되는 거고.'
그래서 선택한 곳이 그 학교였다. 부산에는 어릴 적 친구들도 많이 남아있고, 내게 익숙한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대전과도 멀었으니까. 나는 일단 대전을 떠나기로 했다.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부산으로 떠나왔을 때부터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 시절 여느 대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1학년 내내 술독에 빠져 살았다. 여초학과인 특성상 남학생들이 몇 없었고, 그 친구들과 남자 선배들과 금세 친해져 술을 퍼마시고, 축구도 많이 하고, 학교 앞을 자유롭게 활개치고 다녔다.
나는 대학 신입생이었고,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좁은 여관 카운터에 갇혀있었던 10대의 나는 이제 사라진 것이다.
앞으로 무궁무진한 자유와 밝은 미래가 내 앞에 펼쳐질 것처럼 느껴졌다.
2004년의 봄이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