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놈들이 하나, 둘 입대하기 시작했다. 내가 입학하여 일 년을 보내는 중에 제대한 선배들이 복학하기도 했다. 어차피 가야할 곳이니 너무 늦기 전에 군입대를 하긴 해야겠는데, 계획 없이 무작정 남들 가니 따라가고 싶진 않아 1년을 더 버텼다. 일단 대학생활 좀 즐기다가 수능을 다시 봐서 부산을 뜰까 했던 생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인서울 대학 졸업장을 갖지 못한 것이 나중에 취업시장에서 그리고 이직시장에서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 따위는 예측할 수도, 예측하고 싶지도 않았던 철없는 스무 살이었다.
이미 늦었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대학 졸업장은 나를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어 있었다.
2학년이 되니, 남자 동기놈들은 어차피 군대 가느라 2년을 쉬어야 할 테니 대충 놀다가
입대하는 놈들이 태반이었고, 여자애들은 나름 놀 땐 놀더라도 학점관리를 하거나 교직이수나 복수전공을 한다거나 하며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았다.
뭐 어쨌거나 동기 놈들은 하나같이 먼저 군대엘 가버렸고, 그래도 2학년인데 무작정 놀자니 왠지 이제 슬쩍 양심에 찔려서 그래도 좀 생각 있어 보이는 선배들한테 가서 물었다.
"선배! 취업 좋은데 하려면 지금 뭐 준비해야 돼요?!"
"인마, 니 군대는 와 안 가노? 언제 갈라카노? 일단 군대나 다녀 온나.
갔다 와서 뭐 학점 빵꾸난거 메꾸고, 상대 복수 전공하고, 인턴 같은 것도 해보고 하면 좋지. 영어는 기본이고."
"아~~ 영어!! 근데 선배는 영어 공부 우째 했어요? 토익은 어차피 유효기간 2년인데 지금 할 필요 없잖아요."
"글치. 그거는 난주 졸업하기 전에 점수만 따면 되고. 나는 카츄사* 갔다왔다이가. 그 가가꼬 미군놈들 밑에서 2년 뺑이 치고 나니까 뭐 영어는 좀 배았지."
*카츄사 (KATUSA): 한국 주둔 미육군에 파견 근무하는 한국 군인. 일정 수준 이상의 공인영어시험점수가 있어야 지원 가능했다. (2000년대 초반 기준. 지금 기준은 모름ㅋ, 카튜사가 맞는 발음이지만 카츄사로도 불림)
아. 카츄사!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냥 육군 현역으로 가는 것보다 일도 훨씬 편하고, 월급도 더 받고, 영어도 공짜로 배운다는 전설의 카츄사!
98학번인 그 선배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카츄사에 합격했고, 카츄사로 복무하면서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그 선배 외에도 몇 명의 선배들이 카츄사를 다녀왔다고 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복학을 하고서도, 졸업 직전학기가 되어서도 정신 못 차리고 여전히 술이나 퍼마시고 다니는 선배들이랑 달리 착실하게 스펙을 쌓고 취업준비를 하는 선배들이었다는 점이다.
'나도 일단 카츄사 준비 해야겠다! 그런데, 그럼 영어점수가 있어야 된다는데 어차피 영어공부 할거면 일단 어학연수부터 다녀올까?!
어차피 해외 한번 가고 싶었는데 연수 다녀와서 영어 시험 치고 카츄사 가면 되겠다!'
스물한 살의 나는 단순했다...
일단 계획을 세웠으면 그대로 하기만 하면 되었다. 만약 뭔가 계획대로 잘 안되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1년 넘게 술 퍼마시고 놀아서 여한도 없고, 친구 놈들도 죄다 군대 가버려서 심심하던 차에 여자선배들처럼 지금 딱 어학연수부터 다녀오면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미국, 캐나다는 왠지 싫고, 호주도 그냥 마음에 안 들었다. 영어는 본토에서 배워야지!
그러자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영국.
내가 좋아하는 프리미어리그도 볼 수 있겠다. 바로 거기다.
바로 대전에 있는 어머니께 전활 걸었다.
"엄마! 내 영국 갈라고! 대학 다녀보니까 취업 잘할라믄 영어가 중요한데, 선배들 보니까 다 1년씩 다녀오더라고. 내도 한 1년 가서 영어 배우고 올게!!"
4~5년쯤 전, 부산에서 대전으로 터를 옮겨 숙박업을 이어가시던 부모님의 사업이
그즈음 한창 잘 되고 있었고, 외동아들인 나 하나 어학연수 비용을 대 줄 정도의 여유는 충분했다.
내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 그럴듯한 선물을 받아보거나 부모 양쪽 손 잡고 놀이공원에 가 본 추억 같은 건
거의 없지만, 언제나 아들 기죽지 않게 자신감 하나만은 팍팍 심어 준 부모였다. 어머니는 흔쾌히 그러라며 영국행에 찬성표를 던져주셨다.
그리하여 2005년이 끝나갈 즈음의 어느 겨울날.
나는 대학 입학하여 3학기를 마치고,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채 런던과는 저 멀리 떨어진
잉글랜드 북부의 어느 촌동네로 어학연수란 걸 떠나게 되었다. 체셔(Cheshire) 주에 있는 체스터(Chester)란 곳이었다. 학교 앞 유학원에서 그곳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런던과 멀고, 한인이 별로 없는 곳이라 영어 배우기에 더 좋다는 유학원 직원의 말이 그럴듯해서였다.
그 무렵 나는 같은 과 여학생과 사귀던 중이었는데, 그녀와는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되었다. 이제 2학년인 남자친구가 군입대도 아니고 갑자기 영국엘 간다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얼마나 철없어 보였을까 싶기도 하다. 남자들은 어학연수를 가더라도 군대부터 다녀와서 짧게 가는 게 국룰 아닌 국룰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