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미궁으로 빠져들다.

신혼의 빛깔은 회색

by 박서운과박식빵

본사에서 나의 직속 주재원인 장 부장이 새로 영국법인으로 왔다.

슬로바키아에서 화상으로 면접을 봤던 박 부장은 이제 장 부장에서 인수인계를 해주고 한국 본사로 돌아가게 된다. 한국에서 취업 비자를 기다리며 애태웠던 것이 직접 와서 보니 우유부단하고 끗발 없는 박 부장이 일처리를 제대로 못한 이유에였음을 단박에 알게 되었다. 영국 법인이 커지면서 한국인 직원이 더 필요해짐에 따라 나를 뽑게 된 것이지만, 이 애매모호한 포지션을 그도 몰랐을 리가 없는데, 이제 와서 보니 막판 협상에서 애매하게 깎인 연봉도, 신입들이나 할 법한 업무들만 남겨둔 것도 이게 다 박 부장이 자기는 곧 돌아갈 사람이라 설렁설렁했던 것일까 생각하니 부아가 치밀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난 이미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어떡해서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 온 장 부장은 처음부터 밀착마크하며 잘 파악해야겠다.


그는 풍채가 남다르다. 190cm는 되어 보이는 거구에 커다란 얼굴, 거무죽죽한 피부색에 왕두꺼비 같은 손을 가졌는데 그 손엔 언젠가 해외출장 갔을 때 면세점에서 샀다는 로렉스 시계를 위풍당당하게 끼고 다닌다. 목소리도 우렁차다. 미국에서 몇 년을 보냈다더니 영어도 곧잘 하고, 여기 영국인 사장과도 금세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들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잘 안다.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일단 똥꼬를 빨아줘야 함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리고 이건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술을 같이 마시며 친해진다. 거기다 유부남으로서의 공감대까지 형성하면 게임 끝이다. 한 가지 생각 못했던 것은 막 서른이 되어 해외생활하고 있는 나를 보며 본인이 아내와 함께였던, 나름 힘들었던 석사유학시절을 떠올렸다는 것인데, 그건 계산 못했던 플러스요인이었다.

그는 곧 나를 스스럼없이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야!! 민준아! 오늘 사업계획 보고 끝났는데 한국인들끼리 한 잔 해야지! 진고개(한인타운 뉴몰든에 있는 한식당) 예약해 놔라!"


"민준아! 이거 이거 숫자가 왜 이러냐? 설명 좀 다시 해봐라."


"야 김민주이~ 옷 샀냐? 좋다야?!"


업무파악은 슬슬 끝났고, 어떻게든 실력을 보여줄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좀처럼 변화가 없었다. 장 부장은 사실상 본사에서 현지인 법인장이 회사를 잘 돌리나 감시 역할로 보내는 것이기에 권한은 많지 않았다. 루카스가 헬렌 밑에서 중요한 역할을 거의 대부분 하면서, 나는 자연스레 장 부장과 한국 본사 보고 일에 치중하게 되었고, 가슴은 하루가 다르게 답답해졌다.


'장 부장이야 4년 뒤면 또 돌아가버릴 텐데, 이렇게 계속 주재원 뒤치다꺼리나 하다간 내 커리어도 별 볼일 없겠다. 영주권 따려면 비자도 한 번 연장해야 하고, 무조건 이 회사에서 5년은 버텨야 한다는 소린데, 매니저로 승진도 해야 하고... 그 이후를 위해서라도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한편, 무사히 배우자 비자를 받은 수연이 드디어 영국에 왔다.

결혼식을 대전과 부산 어디에서 하느냐 양가에 갈등이 있었고 갑자기 어머니가 수술을 하시는 바람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수연 역시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로 나에게 도망치듯 오는데 나는 회사일로도 이미 마음이 너무 복잡했지만, 나만 믿고 여기까지 오는 그녀를 보자마자 그런 기색을 내비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나랑 결혼한다고 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세금 떼고 뭐 떼고 사실상 얼마 안 남는 월급으로 사기결혼이라도 당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얼핏 생각하긴 했지만 이 문제를 어떡해서든 해결해야겠단 생각뿐이었다.


2013년 12월 6일 저녁.

영국 전역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절정에 달하고 있지만 연말의 히드로 공항은 왠지 세상 끝의 절망 같이 암울하고 쓸쓸했다. 회사에서 컴퍼니카를 내 차처럼 빌려 탈 수 있는 것이 그래도 큰 위안이다. 너무 경차는 좀 그렇고 그래도 연비도 따져서 적당한 차를 빌려놓았지만, 한 달 반 만에 수연을 마중 나가는 길이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더 좋은 차를 타고 나갔다. 드디어 저 멀리 입국장에서 걸어 나오는 수연이 보인다. 수연은 왠지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집으로 오는 1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 거의 말이 없다.


"야! 왤케 말이 없냐 서방님 보러 오셨는데?!"


"어우~ 야."


그게 끝이라고? 절대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면 6개월 만나고 1개월 반을 헤어져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긴 싶다. 나도 왠지 덩달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세상 행복해야 할 신혼은 사기취업과 사기결혼으로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서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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