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헬조선을 떠나온 대가
학사 출신 비영주권자의 비애
어쨌거나 연말은 아름답게 흘러갔다.
유럽 회사 특성상 12월은 없는 셈 쳐도 될 만큼 쉬는 날도 많고, 모두가 '놀자 놀자 일단 놀자. 모든 것은 새해로 미루자. 그것이 크리스마스에 대한 예의이다.’ 뭐 이런 분위기라 근심을 잠시 잊고 보낼 수 있었다. 수연이 오면 같이 고르려고 남겨둔 큰 가구들을 Ikea에서 고르고 날라서 조립하며 신혼부부 분위기도 내고, 야밤에 빛나는 타워브리지를 걷고, 주말마다 런던 곳곳의 명소로 드라이브를 가기도 했다. 회사에서 주최하는 크리스마스 가면 파티에 초대되어 난생처음 가면을 쓰고 와인을 들이키며 새로움을 만끽하기도 했다. 아직 결혼식은 못 올렸지만 법적으로도 부부요, 시부모도, 처가 부모님도, 친구도 없는 저 멀고 먼 타국의 신혼집에서 단둘이 생활하니 우리에겐 남아도는 깨가 없어야만 했다. 신혼이 깨소금밭이 되려면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신혼생활을 시작하고야 깨달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새해가 되자, 수연에게 조급함과 향수병이 동시에 찾아왔다.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따뜻해지고 봄꽃은 온사방에 만개하는데, 서른의 젊디 젊은 나이에 그 옛날 어머니들처럼 남편 밥이나 차려주고 마트랑 공원만 떠돌자니 한계가 온 데다, 나의 월급이 생각보다 굉장히 빠듯함을 알고 나니 취직을 서둘러서 해야겠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수연은 한국에서의 경력으로 영문 이력서도 쓰고 영국회사, 한국회사, 아르바이트 자리 가리지 않고 입사 지원을 했지만 연락 오는 곳이 손에 꼽힐 정도였고, 어쩌다 합격한 작은 한국 여행사에서는 임신하게 되면 그만둬야 한다고 대놓고 면접자리에서 말하기에 어영부영 기회를 놓치기도 했다. 주재원 부인으로 외국에 온 사모님들과는 달리 취업비자를 받은 내 배우자 자격으로는 수연도 영국에서 합법적으로 똑같이 일할 수 있었지만, 수연이 영국에서 석사 학위를 새로 따든지 스타벅스 같은 카페에서 시급 파트타임부터 시작하지 않는 이상 일자리를 갖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결국 알게 되었다.
그즈음 회사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키가 큰 백인 프랑스 동료와 가까워졌다.
말을 나누다 보니 놀랍게도 그의 아내가 한국인임을 알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분이 한국의 대기업 출신이고, 무려 수연과 나의 대학 선배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영국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많은 좋은 영향력을 끼쳤던 노아와 지현 형수님 부부이다. 그들과는 금세 친해져 집에 초대받아 저녁을 먹고 한국과 고향, 부산에 대한 이야기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노아의 어눌한 한국어 발음과 순박한 웃음은 우리가 현실을 잠시 잊게 해 주었고, 주로 집에만 있는 수연도 이 부부를 만나면서는 영어를 사용할 일이 생기는 점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곳이 외국임을 잊게 해주는 형수님의 휘황찬란한 음식 솜씨는 향수병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한국 유명한 스시집에서나 볼 듯한 비주얼의 스시를 내어주며) 민준 씨, 수연 씨, 이거 노아가 오늘 아침 일찍 이 동네 일식집 가서 스시 만들 거라며 떠온 걸로 만들었어요. 어서 드셔보세요.”
“수연 씨, CV(영문이력서) 쓰는 거 혹시 힘든 점 있으면 제가 도와줄게요. 어느 시간이 편해요? 노아 회사 앞으로 갈 일 있을 때 제가 수연 씨 집에 들를게요.”
“Hey Min-Joon~! How’s it going? Is Soo-Yeon alright? We went to the bakery last weekend I told you. Never tasted such a nice croissant here before I used to have in France. But we finally find one!! You should try there too!!”
(헤이 민준~! 안녕~! 수연 씨는 잘 있죠? 우린 지난 주말에 내가 말했던 베이커리 갔었어. 영국에 온 뒤로 프랑스에서 먹던 크로와상 맛을 찾을 수가 없었는데, 마침내 드디어 찾았다니깐~?! 너희 부부도 거기 꼭 가봐야 해!)
노아, 지현 부부 이외에도 마음 붙일 곳이 한 군데는 더 있었는데,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의 한인타운 쪽에 이종사촌 형 커플이 오래전부터 영국에서 살고 있었다. 형은 대학 시절에 영국으로 건너와 자리를 잡았는데, 얼마 전 한국 출신인 형수님을 만나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들과도 가끔 같이 식사하고 근황을 나누며 가족의 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한편 회사에서 내 입지와 업무 분장은 거의 변화가 없이 시간만 야속하게 흘러갔다. 대략 130명 정도의 직원이 사무직으로 영국법인에서 근무했는데, 그중 열 명 정도가 한국인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이미 영주권 혹은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가족 모두가 영국에 정착한 상태였다. 곧 영주권을 딸 계획인 사람까지 제외하면 나만 유일하게 취업비자 신분으로 일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아주 젊은 시절이나 어렸을 때 영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고, 나처럼 한국의 지방대 출신으로 한국에서는커녕 영국의 학사나 석사 학위가 없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내가 그 정도의 경력과 능력이 되니 한국 학사 출신으로도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거랄 수도 있지만, 비자와 영주권 문제가 해결되는 한 영국에 계속 사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permanant contract’, 즉 정규직이었지만 한국인끼리는 내 이런 상황을 다 알고 있으니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드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미래가 전혀 없어 보이는 한국본사 보고서 작성 위주의 일로 언제까지 이 작은 위치나마 보존할 수 있을지, 이 업무만으로 매니저로 승진은 가능할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루카스를 제외한 나머지 한국인들은 회계팀이나 마케팅팀 등 다른 팀 소속이었는데, 마흔 줄이 훅 넘은 그들을 보니 딱 두 단어가 떠올랐다.
‘포기와 안주’
그들은 한국 회사 직급 체계상으로 따지자면 과장 이상으로는 절대 승진할 수 없었다.
영국법인을 영국인 사장이 장악한 이상, 아무리 한국 기업이라 할지라도 한국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한정되어 있었고, 위치와 승진의 한계까지도 눈에 보이지 않게 정해져 있는 것이 몇 달이 지나자 저절로 알게 되었다. 얄미운 루카스는 그래도 런던에 집을 가진, 잘 나가는 금융권 출신 누나가 있고, 매시간 거들먹거리듯이 ‘강남 출신’이기에 여차하면 한국에 돌아가 잘나셨을 부모덕을 보고 살 정도가 되는 것 같았다.
수연과 나는 공대 출신도 아니고, 상대 출신도 아니고,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큰 인문학을 전공했다. 수연의 한국에서의 경력도 사실 커리어라고 하기엔 애매하며 너무 짧았고, 운이 좋아 여기서 맞벌이를 하게 된다고 해도, 우리가 벌 수 있을 연봉의 합으로는 영국에서 모기지(집담보대출)를 받아 집을 사기란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다. 매달 거의 1,000파운드(한화로 약 180만 원)씩 집 렌트비를 내는데, 어떻게 어둠의 경로로 모기지를 받아 집을 사는 기적에 이른다고 해도 내 연봉으로 이자를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 계산조차 나오지 않았다. 젠장. 한국이나 여기나 결국은 부동산인가. 집주인과 세입자. 그들의 간격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걸까. 갑자기 한국 대전에서 지금도 열심히 숙박업으로 돈을 벌고 계신 부모님이 보고 싶다. 한 5억 정도 가뿐하게 땡겨주셔서 여기서의 집문제가 해결되기만 한다면야 이 거지 같은 회사생활과 짜증 나는 루카스 얼굴마저 참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5억이 무슨 애이름인가. 당장 수도세 고지서만 날아와도 수연과 나는 발발 떨기 일쑤였다.
회색빛 신혼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가을에 예약해 두고 온 결혼식은 점점 다가오는데, 변화는 없고, 앞으로의 변화도 없을 것 만 같다.
결혼식을 위해 미리 끊어둔 2주간의 한국 일정에서 뭔가 다른 묘수를 생각해내야만 할 것 같다. 부모님을 설득해 1억이라도, 아니 5,000만 원이라도... 외동아들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돈을 받아와서 어떻게든 돈을 굴려 불려 볼까? 아님 한국에 간 김에 다 포기하고 차라리 확 한국으로 영구귀국해 버릴까!? 그건 차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부모님도, 나를 믿고 딸을 멀리 보내주신 처가 부모님도, 우리가 영국에서 그럴듯하게 잘 살고 있을 거로만 생각할 친구들에게도 도저히 면이 서지않는다. 쥐똥만한 자존심이 아직은 남아서 그정도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
재킷 안주머니에 늘 사직서를 품고 다니는 헬조선의 직장인 모습이 여기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땅에서도, 그것도 바로 나의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이놈의 회사 때려치워 버릴까! 망할 놈의 영국. 망할 놈의 집값. 망할 놈의 루카스. 망할 놈의 박 부장. 망할 놈의 비자 나부랭이 신세.
가장의 무게는 총각 시절 쉽사리 상상했던 것보다도 어깨와 허리가 모두 휘어버릴 만큼 막중했고, 슬로바키아에선 매주말마다 아웃렛에 가서 명품 구경을 하고 가끔 사기도 했던 나의 빛나던, 그 찬란했던 인생은 사라져 버렸다. 그곳은 어떻게 보면 기회의 땅이었고, 이곳은 기어코 기어들어와 살아내 봐야만 알 수 있는, 박 터지는, 쪼글랑거리는 그 이름도 빛나는 대영제국, 잉글랜드였다. 감히 나 따위가 겁도 없이 무대뽀로 비벼볼 만한 언덕이 아니었던 거다.
-다음 편에 계속-
비틀즈의 거리 Abbey road 인증샷
면접 보고 돌아오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