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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Oct 01. 2020

프롤로그

소녀에서 표범으로

그리고 마침내 방문이 열리자, 다시는 열다섯 살의 나이로 돌아갈 수 없는 상처 입은 암표범을 보게 되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중에서-



‘순수’와 ‘순진’의 차이를 ‘깨끗한 물이 가득 담긴 유리컵’과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유리컵’에 비유한 글을 본 적 있다. 어린아이뿐 아니라 다 큰 어른도 순수하면서 동시에 순진할 수 있다. 깨끗함, 정직함, 선함으로 가득한 순수한 사람은 누구나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좋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착한

사람에서 극단적인 악마나 사이코패스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은 순진한 사람이다.


무엇이 진정 내 행복을 위한 길이고, 어떤 길이 장기적으로 나를살리는 길인지 아는 사람은 소녀에서 표범이 된 여자와 같다. 순수하면서 순진했던 소녀는 한 방울 탁한 오염물이 컵 속으로 떨어지자, 자기 안에 있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강인한 엄마이자 여자가되었다. 어느 날 방문을 열고 나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스스

로 자신과 아이를 지키는 표범이 된 것이다.


용기를 갖게 된 사람, 각성할 계기를 거쳐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된 사람, 그것을 지키는 것이 값진 인생을 사는 것임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떤 장애를 만난다 해도 결코 불행해질수가 없다.


나는 그저 “네네.” 하기만 했던 고분고분하고 평범한 며느리로 살다가 어느 날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있었다기보다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를 방치하기 싫었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내 기분이, 내 일상이, 내 삶이 망가지는걸 두고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보호해주어야만 했던 소

녀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표범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시어머니에게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

지만 조금씩 하다 보니 아닌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속상하다고,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달라고 말할 줄 알게 되었다.


둘째 안 낳으면 남편이 바람피워서 애 낳아 올 거라는 막말에는 “아버님이 밖에서 애 낳아 온다고 하면 좋으시겠어요?”라고 맞받아치고, 안부 전화 좀 자주 하라는 잔소리에는 살림하랴 육아하랴 돈까지 벌랴 내 몸 건사하기도 힘들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늘 되받아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나는 성격상 애교도 부릴 줄 모르고 맘에 없는 말도 할 줄 몰라서 처음에는 시가와의 갈등 상황에 융통성 있게 대처하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은 나도 아주 조금씩이지만 바뀌려 노력하고 있다.


최근 남편이 아이에게서 기관지염이 옮은 뒤 감기가 오래가는가싶더니 급기야 폐렴에 걸려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시아버지와 남편이 몇 번 통화할 일이 있었고, 입을 틀어막아도 나오는 기침 소리가 너무 걱정이 된 시아버지가 ‘커다란 돋바(두꺼운겨울 재킷)’를 사서 부치셨다. 예전 같았으면 ‘걱정도 참 유난스러우

시네!’ 하고 넘기거나, ‘나도 두꺼운 재킷 없는데 내 걱정은 안 되시나, 사시는 김에 물어나 보시지.’ 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법한데, 이번엔 다르게 대응했다. 커다란 우체국 택배 상자가 오자마자 뜯어보곤 시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린 거다.


“아버님, 아비 잠바 잘 받았어요. 그런데 제 건 없어요? 호호호.”


그러자 시아버지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너도 잠바 없냐? 그래, 하나 사서 보내주마.”


사나운 맹수가 사냥할 때 전략도 없이, 기다림도 없이 바로 달려들지는 않는다. 나는 영악하게, 영리하게, 능글스럽게 변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2, 3년 전보다 훨씬 평화롭고 활기차다. 상처에 내성이 생겨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런 변화 또한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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