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는 절대 간섭 안 하는 분이야. 나 부산에서 대학 다니는 7, 8년 동안 우리 엄마 한 번도 안 오셨어!
반찬 한 번 보내준 적도 없다니까! 나중에 결혼해서 아기 낳아 데려다 놓으면 다 키워주실걸?”
남편이 남자친구이던 시절 나에게 했던 말이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아아, 나는 얼마나 순진했던가.
남편과 나는 85년생 동갑내기이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졸업한 04학번 동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사귀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2013년으로, 대학에 입학해 처음 만난 지 9년 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서울에서 자취를 하며 두 번째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남편은 슬로바키아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영국 지사로 옮기기 위해 비자 준비차 몇 달간 한국에 와 있던 중이었다. 대전 본가에서 지내며 간혹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에 오던 남편은 대학 동기 모임에서 나를 다시 보고는 적극적으로 대시를 했다. 그때 나는 매일 밤
10시, 11시까지 이어지는 야근에 지쳐 있었고, 몇 번의 연애가 실패로 끝나 의기소침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말 잘 통하던 편한 대학동기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사귀는 사이가 되어, 퇴근 후 맥주 한 캔 들고 야경이 반짝이는 낙산공원 성곽 길이며 창경궁을 거닐었다. 그와 함께걷는 따뜻한 봄날의 여의도 한강공원은 여느 때와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자주 그에게 전화를 걸어 회사 생활의 고초를 토로했고, 그가 서울로 올라와 데이트하는 주말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입에서 어머니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이 나왔다. 서울의 병원에 검진받으러 올 일이 있는데, 마치고 대전으로 내려가기 전 보자고 했다. 순간 이전 연애 경험들이 스쳐갔다. 아직 결혼을 약속하지 않은 상태로 상대방 부모를 만났을 때 부담스러운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20대 초반에 사귀던 전 남자친구의 부모님은 누나 결혼식 같은 집안 행사에 나를 불러댔고, 툭하면 그 사람의 아버지에게서 온 전화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남자친구는 슬로바키아에서 혼자 지낸 몇 년이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얘기하며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쳐왔고, 나 역시 서른을 목전에 둔 내 나이를 약간 의식하던 중이었다. 내심 이 만남이 결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그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한 말이 있으니, 인사를 나누더라도 큰 부담은 없을 것이라 어느 정도 안심도 했으리라.
이태원이었던가, 번화가 골목에 위치한 한 막걸리 집에서 지금의 시어머니와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첫인상은 조금 무서웠지만 말수도 많지 않고, 시종일관 웃으며 나를 대하시기에 어려운 자리라는 긴장감이 조금 줄어들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주말마다 서울에 가고, 결혼하고 싶다는 말까지 해뒀으니 내가 어
떤 여자인지 얼마나 궁금했겠는가.
좀 어색하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기분 좋게 첫인사를 마치고 어둑한 길거리로 나섰을 때 어머니가 슬그머니 내 팔짱을 끼셨다. 친정엄마와도 팔짱 끼고 걸은 적 없을 만큼 무심하고 무뚝뚝한 나는 그 팔이 너무 어색해 뿌리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와 안면을 트고 나니, 그동안 데이트할 때마다 남자친구에게 수시로 걸려오던 어머니의 전화가 눈에 띄게 줄었다.
어쩌면 이때, 딸 없는 시어머니는 내게서 ‘딸 같은 며느리’를 갖게될 것이라는 희망을, 나는 그분이 간섭 없는 ‘쿨한 시어머니’일 거라는 희망을 엿보았던 것 아닐까.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가진 성격의 스펙트럼에서 정반대에 있는 가식을 훔쳐보고 멋대로 서로를 규정지었다. 그것이 끝없는 전쟁의 출발점이었던 것도 모른 채...
*이 글은 -본격 며느리 빡침 에세이-<님아, 그 선을 넘지마오>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