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타이밍이라고 하더니, 그와 나의 결혼이 그랬다. 영국행을 포기할까 싶도록 애를 태우던 남자친구의 영국 비자가 8개월 만에 나오자, 그는 같이 가자며 정식으로 청혼했다. 나와 유머 코드도 맞고 친구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남자친구가 좋았기에 나도 흔쾌히 청혼을 받아들였다. 외국에서 안정적으로 같이 살기 위해서
는 동거보다 법적 배우자가 되어 배우자 비자를 받는 것이 좋았다. 그 편이 부모님에게 갑작스런 영국행을 허락받기에도 유리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서둘러 양가 부모님을 뵙고 결혼 허락을 받았다. 영국에서 출근하기로 한 날짜가 촉박해 예식은 다음 해에 휴가를 내 돌아와서 하기로 하고, 내 비자 신청을 위해 혼인 신고부터 했다. 마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사귄 지 5 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남편이 나보다 한 달 앞서 영국으로 떠나기 전날, 배웅하기 위해 예비 시가에 갔다. 그때까지 예비 시부모님과는 서너 번 정도 만난 사이였다. 그날 시부모님은 준비해둔 케이크를 건네며
“우리 가족이 되어주어 고맙다. 잘 지내보자.”고 하셨다.
거기까진 참 좋았는데… 덧붙인 어머니의 한마디.
“이제 친구 아니고 결혼한 사이이니 서로 ‘○○ 씨’라고 불러라.”
스무 살 때 학과 동기로 알게 된 사이였기에 연애를 시작하고도 우린 특별한 애칭 없이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갑자기 단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호칭을 쓰라니…. 당장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예비 시어머니의 첫 충고와도 같은 말씀이니 신입 며느리인 내게 얼마나 큰 중압감으로 다가왔겠는가. 나는 뭐라 반박도 못 하고 그저 “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우리가 서류상 혼인 신고를 한 날이었고 ‘남자친구의 어머니’ 역시 ‘남편의 어머니’로 신분이 바뀐 날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뒤 시부모님을 만날 때 평소와는 다른 그 어색한 호칭으로 남편을 불러야 했다. 결혼했으면 정말 어른이 된 것이니 호칭부터라도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라는 의미로 이해했는데, 그 기준은나에게만 적용되었던 걸까.
남편은 결혼 후에도 한 번도 내게 ‘◯◯ 씨’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내 이름의 끝 자를 불렀고 시가에 가서도 조심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남편을 꾸짖거나 고치라는 충고 한번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말은 결국 시어머니의 아들인 남편을 잘 모시라는 명령이었던 걸까. 그것이 아들과 며느리 간의
위계를 정해준 말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어머니의 지시는 아이를 낳은 후에 남편을 ‘◯◯ 아빠’라고 바꾸어 부르면서 과거의 일이 되었다. 지금의 나라면 이렇게 따져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머니, 남편은 저한테 ○○ 씨라고 안 부르는데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돌이켜 생각하면 감히 시어머니 말에 토를 달지 못할 신분의 예비 며느리에게 던진 그 한마디가 나를 몇 년이나 옭아맸던 것이다.
힘의 우위에 있는 사람이 약자에게 미치는 말 한마디의 위력에 대해 생각해본다.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까지 유보하게 만드는 그 힘 말이다.
*이 글은 -본격 며느리 빡침 에세이-<님아, 그 선을 넘지마오>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