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신혼 생활을 할 때 남편의 큰이모님 내외가 영국에 오신 적이 있다. 큰이모님은 시어머니의 큰언니로, 남편을 키우다시피 해주신 분이라 남편이랑도 각별하다고 했다. 영국에 살던 남편의 이종사촌 형이 결혼하게 되면서 형의 어머니인 작은이모님과 같이 겸사겸사 놀러 오시게 된 것이다.
우리는 큰이모님이 영국에 계시는 동안 우리 집에서 하루 머무르시게 하고, 런던 근교도 여러 곳 모시고 다니며 관광을 시켜드리기로 했다. 결혼하자마자 영국에 살게 되어 시가 행사에 참여하거나 시가 어른들을 뵐 기회가 없었던 나는 큰이모님 내외의 방문에 긴장한 상태였다. 시어머니와 각별한 자매간이니 내가 살림을 꼼꼼하
게 하고는 있는지, 어른을 얼마나 잘 대접하는지 모두 시어머니 귀에 들어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두 분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더분했다. 나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셨고, 영국에서 지내는 며칠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다. 나 역시 한국 마트에서 장을 봐다가 아침도 정성스럽게 한식으로 대접하며 최선을 다했다.
두 분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쇼핑하고 싶다고 하셔서 근교의 아웃렛에 모셔다드리자 이모님은 고맙다며 좋은 냄비도 하나 선물로 사 주셨다. 그렇게 두 분은 한국으로 돌아가셨고, 잘 도착했고 고마웠다는 인사도 전하셨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시는 동안 나에게 편하게 대해주셨지만, 아무래도 시어머니의 친정 어른들이시니 하나라도 실수하거나 섭섭하게 해드리면 안 된다는 마음의 부담감이 있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 없이 잘 마무리된 시가 어른 모시기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며칠 뒤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잘 다녀왔다더라. 잘했다. 고맙다.”
그렇게 말씀하시기에 다행이다 싶었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은 할 말을 잃게 했다.
“언니는 새 며느리한테 가방 선물 받아 왔더라. 영국 거라고 좋다고 엄청 자랑하더라. 나는 내 것도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 며느리는 안 보냈더라고.”
귀국하는 이모님 편에 시어머니 선물을 보내지 않았다며 나를 타박하는 말씀이었다.
당시 우리 부부는 거주 비자를 받기 위해 혼인 신고만 한 채 영국에서 살고 있었다. 결혼식은 몇 달 뒤 한국에 돌아가 올릴 예정이었기에 시가 친척들과의 인사는커녕 시부모님과도 몇 번 만나지 못한사이였다. 나라면 아직 두세 번밖에 본 적 없는 며느리의 신혼집에 친정 식구를 보냈으면 미안하고 고마웠을 것 같은데, 시어머니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아직 얼빠진 새내기 며느리였던 나는 시어머니의 말에 또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그저 어설프게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대신 결혼식을 위해 몇 달 뒤 한국에 들어갈 때 시어머니 선물로 버버리 가방 하나를 사 갔다. 뭔가를 기다리실 것도 알았고, 영국에 산다는 아들 부부를 자랑하고 싶어 할 ‘시어머니의 체면’을 위해서.
물론 지금의 나라면 시어머니에게 무조건적으로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을 버렸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고가의 선물을 하진 않을 것이다. 감사한 일이 있는 경우, 형편에 맞는 수준으로 준비할 것이다.
선물이란 주는 사람이 감사한 마음에서 우러나와 준비하는 것인데, 그 반대가 되니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옆구리 찔러서 받는 선물에 대체 어떤 기쁨이 있을까. ‘실수하더라도 처음이니 저를 좀 예쁘게 봐주세요.’ 또는 ‘가족이 되어주어서 감사합니다.’ 하는 진심의 선물이 아니라, ‘내가 네 시어머니이니 이 정도는 해라.’ 또는 ‘이 정
도면 되려나?’라는 계산이 들어가버리면 그 순간부터 그것은 선물이 아니다.
영국에 사는 동안 이따금 걸려온 전화를 통해 시어머니의 성격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저 전화로 안부만 전하는데도 갈등 상황은 생겼고, 나는 그때마다 다짐했다. 절대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외국에서 쭉 살아야겠다고.
그런데 삶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고, 2년 반 만에 한국에 돌아와 시가 근처에 살게 되면서 나의 삶은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이 글은 '본격 며느리 빡침 에세이' <님아, 그 선을 넘지마오>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