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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식빵 Oct 02. 2020

#4.솜씨 발휘 한번 해봐라.

-첫명절, 시어머니의 망언-



시가는 차례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안이다. 멀리 사는 큰아버님 댁에서 지내긴 하는데, 형제들 사이가 좋지 않아 명절에도 가지는 않는다. 그래서 따로 차례 음식을 준비하진 않고, 선산에 성묘 갈 때 시조부모님이 좋아하셨다는 빵이나 술, 과일 정도만 사서 가는 편이다. 남편이 어릴 때부터 그랬다니 이 전통(?)은 30년도 더 된 것인데, 한국에 들어와 맞이한 첫 명절을 앞두고 시어머니가 뜬금없는 말씀을 하셨다.


“며느리 들어왔으니 네가 솜씨 발휘 한번 해봐라!”


그 솜씨 발휘란 시어머니 본인은 며느리로서 단 한 번도 해보지않은 일이다. 장사하신단 이유로 제사에도 참여한 적 없고 명절 음식도 하지 않은 까닭이다.

나는 친정에서 엄마가 1년에 총 일곱 번의 제사와 차례 준비하는 걸 봐왔고 도왔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할 수 있었다. 친정엄마가 시어머니 안 계신 집안의 맏며느리로 얼마나 고충을 겪었는지 너무 잘 알기에, 결혼 전 시가가 제사 안 지내는 집안이라는 걸 듣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인지. 더 황당한 건 시어머니 당신은 바쁘니 나 혼자 다 준비해서 와야 한단다.


당시 아이가 8개월 무렵이라 기어 다니면서 한창 저지레를 해서 손이 많이 갈 시기였다. 남편에게 성묘 갈 때 어떻게 준비했었는지 물으니 예의 그 대답이 나왔고, 차례를 지내는 것도 아니기에 하던 대로 간단히 준비하면 되는 거로 생각했다. 이번에는 당신들 대신 아들과 며느리가 준비를 해보라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추석 오전, 준비한 것을 가져가 시어머니에게 보여드렸더니 눈빛이 험악해지면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너는 대체 우리 집안을 뭘로 보는 거냐? 얼마나 우리 집안을 얕봤으면 이딴 걸 준비라고 해 올 수 있냐! 며느리가 되어가지고, 이걸 준비라고 한 거냐?! 제정신이면 이럴 수가 있냐? 너도 좀 봐라. 이게 집안 무시하는 게 아니고 뭐냐!”


늘 이렇게 해왔으니 이거면 될 거라고 했던 남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나는 시어머니 앞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야만 했다. 그녀는 작정이라도 한 듯이 나를 쥐 잡듯 잡았다. 그날의 서러움은 도저히 잊히지가 않는다.

다시 제대로 솜씨 발휘를 해 오라는 말씀에 마트에서 전 부칠 재료를 사서 우는 아이는 내버려둔 채 꼬치구이, 호박전, 동그랑땡, 각종 튀김 등 처녀 때 엄마를 도와 하던 ‘솜씨’를 부렸다.

오후에 다시 들고 가니 합격. 이렇게 잘할 수 있는 걸 왜 안 해 왔냐는 기가 막히는 말씀까지 덧붙인다.

그 뒤의 명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얘, 그건 내가 너 길들이려고 그랬던 거지. 처음이 중요하니까!”


한참이 지나서야 그때 일을 꺼내며 하신 말씀에 가슴이 턱 막혔다. 내가 길들여져야 하는 존재인가? 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눈물콧물을 쏙 빼게 울려서라도 ‘며느리’로 길들이는 것이 ‘시어머니’가 가진 권력인 걸까? 이 땅에서 ‘시댁’은 그런 하늘 같은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인 걸까?


결혼 후 시부모의 말에 토 달지 않고 고분고분 하라는 대로 하도록 길들이겠다는 속뜻은 곧, 며느리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대신 새로 들어온 강아지 취급을 하겠다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누가 들어도 맞지 않는 비상식적이고 이상한 시가의 법칙. 새로운 가족을 길들여야 할 존재로 인식하는 사고방식.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르는 희한한 세상이 시가에만 가면 나타난다.



*이 글은 -본격 며느리 빡침 에세이-<님아, 그 선을 넘지마오>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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