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육 남매 중 장남으로 내게는 고모가 넷, 삼촌이 한 분 계신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할아버지 혼자 육 남매를 키우셨다. 그런 집안의 장남과 결혼한 엄마는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며 어린 막내 삼촌과 고모의 뒷바라지까지 맡아 해야만 했다.
엄마는 내가 네 살일 때 동생을 낳았는데,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새벽에 일어나 재수생이던 삼촌의 도시락까지 싸는 등 힘든 시집살이를 했다고 한다. 육 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에 간 막내 고모는 대학생이 될 때까지 우리와 같이 살았다. 어린 시누이와 시동생까지 보살피며 키우다시피 한 우리 엄마는 고모들 입장에선 일찍 돌아가신
엄마 대신이었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 엄마는 언제나 지쳐 보였고, 할아버지의 매정한 성격 탓에 우는 일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20대 후반일 때 돌아가셨다. 엄마는 30년 가까이 시아버지를 모시고 산, 그 시대의 흔한 희생의 상징, 맏며느리였던 것이다.
고모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해 나에게는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한 살 터울로 태어난 사촌 언니, 동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명절만 되면 할아버지가 계신 우리 집으로 고모들과 사촌들이 몰려들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가끔 밀양에 있는 외갓집에 가기도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명절에도 가지 않았다. 외가에도 외삼촌들이 줄줄이 있어서 또래의 외사촌들이 많았지만, 명절에도 가지 않게 되자 외사촌들과는 점점 멀어졌다. 이종사촌 언니의 결혼식에 갔다가 훌쩍 어른이 되어 만난 외사촌 오빠는 10년 만이어서인지 길에서 마주치면 모르고 지나갈 만큼 낯설었다.
엄마가 명절에도 친정에 가지 못한 이유는 오후만 되면 고모들과 사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는 또래의 사촌들과 놀 생각, 또 고모들과 삼촌에게 세뱃돈 받을 생각에 나와 동생에겐 명절이 그저 즐겁기만 한 날이었다. 그런 명절에 왜 엄마는 더 힘들어 보였는지 어린 나는 알 턱이 없었다.
고모들은 각자의 시가에서 차례를 지낸 뒤 친정인 우리 집에 모여 꼭 하룻밤 자고 갔다. 육 남매 일가가 모두 모이면 스무 명도 넘는 대식구가 되는데, 엄마 혼자 그 많은 손님들을 대접하느라 명절이 지나면 꼭 한 번씩 앓아눕곤 했다.
시간이 흘러 내가 며느리가 된 뒤에야 그때 엄마가 명절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친정에 가고 싶었을지 헤아리게 되었다.
엄마가 며느리이고 올케이고 아내이던 시절보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여전히 며느리들은 명절을 싫어하고, 시가를 어려워하고 고부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고부 갈등이 원인이 되어 이혼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고부의 문제는, 며느리가 시가에서 겪는 불합리와 부당함은 왜 이다지도 천천히 변하는 것일까.
그저 내 아내가 좀 참으면 되는 문제로 치부한 남편, 나도 겪은 일이니 당연히 내 며느리도 그래야 하는 일로 생각하는 시부모, 화가 나고 괴로우면서도 말하지 못하고 묵묵히 나쁜 관행들을 이어온 며느리들 모두가 문제였지 않을까.
큰 변화가 눈에 보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시작은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나부터 변한다면 모든 것이 시작될 것이다.
모두에게 예쁨받아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과 압박에서 벗어나자. 우리는 '며느리가 되어' 시부모에게 예쁨받기 위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결혼한 것이다.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화가 나는 일은 화가 난다고 똑바로 말하자.
그것은 우리가 예민해서도, 이기적이어서가 아니오, 자기 감정과 생각을 똑바로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본격 며느리 빡침 에세이 <님아, 그 선을 넘지마오> (박식빵 지음. 2020.03.북로그컴퍼니 출간)- 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