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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의바른악당 Feb 28. 2020

신천지가 사람을 꼬득이는 방법

8년 전쯤이다. 직장을 관두고 막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앞에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우연히 나와 같은 직종의 사람을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구의 소개로 봤는지, 인터넷 모임인지 도통 떠올려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내가 이 직종을 계속 이어가야 고민하고 있었기에 때마침 같은 직종 종사자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반가웠다. 만났을 때 깔끔한 커리우먼 느낌이 나는 외모가 주는 신뢰감은 상당히 무시 못할 하나의 신뢰할만한 자격으로 다가왔다. 



저 사람이라면 나의 커리어 상담을 해봐도 좋겠다 생각하며 만남을 이어가야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와의 만남은 카페에서 이뤄졌다. 직장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니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왜 강사란 직업을 택하게 됐는지 말해줬다. 자기도 일하다 지쳐서 직종 전환을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는데, 그녀가 성경 구절을 읽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성경 구절을 읽는 공부를 함께 해보자고 한다. 무교인 나는 이것이 쉽사리 납득되지 않아, 그녀의 정체성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졌다. 서울대 강의를 나간다는 그녀가 강의 교안을 슬쩍 보여주는데 정보유출 때문에 공유는 안 된다고 했다.  


뭐 여하튼 그렇게 우리는 종종 만나서 성경 구절을 읽었는데, 사실 난 성경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나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줘서 그 답례로 만나며 성경공부를 답례로 했던 것이다. 


부담 없는 만남에서 성경공부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점점 횟수를 늘려가며 강제적인 만남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주3회, 주5회 20분씩 이런 식으로 가볍게 시작한 구절읽기가 압박이 되어 결국 난 이 만남을 포기했다. 이 사람을 통해 나의 커리어를 향상시키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나의 얄팍한 생각을 반성하며, 홀로 취업 준비에 들어갔다. 


같이 성경공부를 했지만, 성경을 잘 모른다는 생각도 만남을 끊은 계기가 되었다. 무교인 나는 불교, 기독교 교리에 관한 책을 종종 읽는다. 그러다 우연히 읽은 성경구절을 질문하는데 잘 모르는 것이었다. 초짜인 나보다 더 성경을 모르는 성경공부자라... 


이상함에 이상함이 꼬리를 무는데, 내 커리어 쪽에 종사한 더 좋은 전문가를 소개해줄 테니 만나자고 한다. 더 이상 성경공부를 하지 않기로 결단 지었던 터라, 그 만남의 약속도 정중히 거절했다. 이때부터 정말 집요하게 연락이 왔다. 첨엔 예의상 답변을 해줬지만 나중엔 연락을 씹었다. 그래도 또 연락이 왔다. 그래서 또 씹었다. 그 뒤로 연락이 오지 않았고, 그것으로 그녀와의 만남은 종결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의 원인으로 신천지가 떠오르면서, 이때의 경험을 생각한다. 이것이 신천지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신천지를 욕하지만 이들의 정체는 생각보다 쉽게 알 수 없다. 왜냐면 너무도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식인들이다. 내가 만난 그 사람은 그랬다. 신천지가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은 생각할수록 고도화된 수법이다. 마케팅 전략가들이 배워가야 할 한 수다.


1단계: 만남의 계기를 마련하는 단계 

이들은 절대 처음부터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관심사, 모임 등을 통해 나의 정보, 현재의 고민을 파악한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중요한 건 고민을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는 건 공감이다. 자신을 이해해주고 있단 느낌을 받으면, 호감을 느끼게 된다.      


2단계: 지속적 만남을 유도하는 계기를 만드는 단계  

카페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그렇다. 미끼 투척 단계이다. 상대방이 부담을 가질까 이에 드는 일체 비용을 자신이 지불한다. 성경의 구절을 같이 읽고, 부담 없는 분량으로 점차 횟수를 늘려간다.  


3단계: 다른 사람 소개를 통한 네트워크 확장 단계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려고 한다. 난 2단계와 3단계 중간에서 끝을 맺었지만, 이 네트워크에 빠져들었으면 결과는 어찌되었을지 모르겠다. 


신천지가 하나의 이슈로 떠오른 지금 이 기억은 어렴풋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왜 혹했을까. 외로움이란 강한 바이러스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당시의 나도 고민을 털어놓을 곳이 마땅찮을 때 내 이야기에 공감해준다는 사람을 만나 고마움을 느꼈다. 너무 쉽게 사람을 믿고 의지했다. 


공감은 대중적 소통의 묘약 같이 중요한 덕목이 됐지만, 반대로 그걸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더 죄질이 나쁘다. 자주 이런 사람에게 혹하는 사람들을 보면 심신이 지쳐있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 누군가 나의 외로움을 이용해 잘못된 신념을 스며들게 할 수 있으니까. 신뢰에는 논리가 작용하지 않는다. 믿고 싶으니까 믿는 것이다. 무지보다 잘못된 신념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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