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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 nest Aug 20. 2017

공(空) 간(間)에 대한 생각

한국, 돈에 눈먼 미술관에 대해

어떤 공간은 그곳을 가득 채운 뭔가가 느껴진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사람과 단 둘이 차에 있을 때, 그 공간은 무언가로 터질 듯 가득 찬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풍경의 온도나 질감 색상도 다르게 느껴진다. 공간을 구성하는 것은 많은 요소가 있다. 그리고 그 요소는 고정적인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고로 절대적으로 좋은 공간이라는 건 없다.! 고 생각한다.


공간이란 빌 공(空)에 사이 간(間)을 사용하며 본래는 빈 곳이라는 뜻이다. 영문으로는  space, room 등으로 번역된다. 우리는 공간이라는 단어를 빈 공간에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분명 공간이라는 단어는 무언가가 들어서있는, 무언가로 차있는 곳을 제외한 나머지, 공기가 들어서 있는 공간이다. 공기는 무형의 것들로 채워진다. 내음, 빛, 온도, 공간감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좋은 공간이라고 할 때 우리가 서있을 수 있는 곳은 바로 그 공(空) 간(間)이다. 우리도 공간의 일부다. 이런 이유에서 공간이란 어찌 보면 그 비어있는 곳을 누가 채우느냐가 중요한 곳이다. 


LA, california 에 있는 the broad museum 앞 풍경, 각자 보드를 챙겨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공간을 채우는 요소 중에 가장 컨트롤하기 힘든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 그 사람의 생김새, 옷차림, 생각 같은 것들 말이다. 그중 요즘 공간을 잘못 채워나가는 것들이 있다. 되려 그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좋은 공간이라는 곳을 가득 채우고 있다. 나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공간을 찾는 사람을 싫어한다. 예를 들면 이번에 사비나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셀피라는 전시를 다녀왔다. 입구에서 뭣도 모르고 덜컥 2인 1만 원이라는 금액을 결제하고 들어가 보니 현장은 참담했다. 미술관에서 전시해 놓은 콘텐츠를 맛보기 위해서는 기본 1시간의 대기 시간이 필요했고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좋은 전시작이라고 느껴졌던 작품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반응이 무덤덤했다. 다들 입구에서 줄 서서 네온사인으로 만들어진 해시태그 셀피를 찍어대기 바빴다. 적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입구에서 계산해 준 그 사람들이 문제다. 미술관도 돈을 벌어야 유지가 되는 것은 이해한다만 5천 원도 아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전시 상태라면 입구에서 귀띔이라도 해주어야 하는 게 맞지 않는가? 결국 그 전시를 찾은 많은 사람들은 본인이 그 전시를 즐기는 것보다도 내가 이 전시를 왔다는 사실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예쁘게 알리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인 것이다. 전시 내용에 관해서는 관심도 없다는 말이다. 좋게 생각해서 주제가 셀피인 만큼 "이런 행태 자체를 예술로 표현하려고 한 것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우둔한 사람들에게 5천 원씩 받아가며 만드는 예술은 아무래도 치졸하다.


대림 미술관의 라이언 맥긴리 전시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GQ의 기사를 인용하자면, 


["다소 감정적인 대응을 떠나서, 그 방식이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이 보여주는,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길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라이언 맥긴리의 사진에는 젊은이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거기에 ‘세대’나 ‘젊음’이나 하물며 한국에선 이미 어떤 식으로 박제되어버린 ‘청춘’ 같은 말로 뭉뚱그려 일반화할 수 있는 속성이라고는 없다. 거기엔 오히려 어떤 집단으로부터 동떨어진 채 자기들끼리의 일탈로서 어떤 고립을 즐기는 극단적인 개인이 있다. 그토록 가깝고 내밀한 개인 사이의 거리가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다. 그렇게 친구다. 그걸 모아놓고서 ‘청춘, 그 찬란한 기록’이라 이름 붙이는 것은 자체로 부적절할뿐더러 결국 작품에 대한 모독이다."]


그 당시 청춘이라는 단어 자체가 굉장히 먹혔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을 유통하는 미술관들이 상품의 내용을 왜곡해서, 청춘 따위의 카테고리로 현혹한 것은 창피한 일이다. 더 창피한 건 이를 따라 하는 사비나 미술관 같은 곳들이다. 이는 단연 미술관만의 문제는 아니다. 요즘 한국의 힙스터들이 찾는 카페와 가게에는 얼마나 많은 공간들이 왜곡되고 소비되고 있을까? 문화, 음식, 제품에 대한 진정성, 거짓말이 얼마나 흔해 빠졌는지, 업계에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문화를 사랑해서 만든 복합 문화공간 따위가 그 시작이었다. 


가구나 조명을 비롯한 물건들이 들어서고 남은 공간, 그 공간에는 공기에 담길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빛이나 향기, 내음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 그게 가장 중요한 콘텐츠다. 


최근 어디선가 "대림 미술관은 왜 줄 서서 입장하는 미술관이 되었는가?"따위의 제목을 내건 기사를 봤다. 미술관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대림 미술관이 미술관이기를 포기한 것쯤은 알고 있을 터이다. 지금의 대림 미술관은 마치, 돈을 내고 음식을 주문하고 한 숟가락도, 커트러리의 끝으로 양념도 찍어먹지 않고 나와버리는 식당과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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