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이루지 못한 인간 박근혜 평생의 과업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려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계획은 두 가지 사건에 의해 좌절됐다. 하나는 세월호 참사였고 두 번째는 자신의 탄핵 사건이다.
그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인 까닭을 우리는 쉽게 추측한다. 아버지의 업적이 기술된 몇 페이지에 대한 집착, 아마도 그가 대통령이 되려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그 과업을, 박 전 대통령은 취임 4개월 만에 실행에 옮긴다. 그는 2013년 6월, 학생들이 6.25를 남침인지 북침인지 잘 모른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우리 역사 교육이 잘못됐다는 증거"라고 했다. '역사교과서' 자체를 언급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별다른 논란은 불거지지 않았다. 그러나 교육부는 즉각 움직였다. 그로부터 8개월 뒤 방향은 국정화로 정해졌다. 박 전 대통령은 2014년 2월 13일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역사 교육의 편향성 논란을 언급하며 "균형 잡힌 역사 교과서 개발안을 만들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2달 뒤 세월호 참사가 터지며 이 사안은 수면 밑으로 들어간다. 박 전 대통령이 다시 이 문제를 끄집어낸 것은 2015년 10월에 이르러서다. 박 전 대통령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 국정화 작업에 속도를 낸다. 당시 대통령 지지율이 다시 50%를 넘나들게 되면서 국정운영의 동력을 확보한 것도 배경이 됐다.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게 저항했다. 그럴수록 박 전 대통령은 발언의 수위를 높여갔다. "역사에 대한 자긍심이 없으면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2015년 10월 13일 수석비서관회의)",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만들려는 노력이 정치적 문제로 변질되면 안 된다"(10월 22일 여야 지도부 회동) 등 강한 어조로 국정화 반대 세력을 비판했다, 정쟁이나 일삼는 집단이라고. "자기 역사를 모르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는 유명한 말(2015년 11월 10일 국무회의)도 이때 나왔다.
2016년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참패했다. 국정화 강행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2016년 4월 언론사 편집국장 간담회에서 그는 국정화 필요성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부친의 행적이 포함된 60, 70년대 역사를 긍정적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솔직한 의도도 이제는 감출 필요가 없었다.
1. 지금의 교과서는 한반도 국가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는 것처럼 기술한다.
2. 6.25 전쟁의 책임이 북한에 있는 게 아니라 남북에 같이 있다거나 분단의 책임이 대한민국에 있다고 본다.
3. 북한의 천안함, 연평도 등 도발에 대해선 그 의미를 애써 축소한다.
4. 우리의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세계가 부러워하는 데도, 교과서는 반노동적이라는 등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우리 현대사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로부터 8개월 후 국회는 찬성 234명, 반대 56명, 기권 2명, 무효 7명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안을 가결시켰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이루지 못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과제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꼽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아시아경제. 2015년 10월 12일 자.
부친 결부된 '현대사관 재정립' …임기초부터 뜻 내비쳐
50% 지지율, 집권 3년차 …사실상 마지막 기회로 본 듯
세월호 비선실세 등 이슈 터져 집권초반 추진 실기(失期)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로 '이념전쟁'에 불을 지핀 것은 그만큼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하려던 숙원사업이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그동안 박 대통령은 4대 부문(공공ㆍ노동ㆍ교육ㆍ금융) 개혁 등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기 위해 정치적 논쟁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정치권에서 개헌 논의가 불거질 때마다 '경제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며 부정적 태도를 보였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시기적으로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념 문제를 꺼냄으로써 여권 분열을 일시에 봉합시키며 보수층을 결집하겠다는 취지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국정 장악력이 살아있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고 가겠다는 의도가 더 강하게 드러난다. 지지율이 50%를 넘나드는 현시점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사실상 마지막 기회라고 보는 것이다. 아울러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야당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한 협상용 카드로 활용한다는 전략적 판단도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사안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국정화의 필요성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있다. 13일 오후 방미(訪美) 출국에 앞서 열리는 국무회의에서 입장을 밝힐 기회가 있지만 그마저 황교안 총리에게 회의를 대신 주재토록 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12일 박 대통령의 의견 표명 계획을 묻는 질문에 "지금까지 대통령께서 올바르고 균형 잡힌 역사교과서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신 바 있다고 전했는데, 현재로서 이것 이상의 말씀이 있을 계획은 없다"라고 말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통한 '근현대사 좌편향 해소' 작업은 사실 박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시작됐다. 박 대통령은 취임 4개월째이자 첫 6ㆍ25를 맞았을 때 이 문제를 처음 거론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학생들 중 상당수가 '6ㆍ25가 남침인지 북침인지 모른다'는 결과가 나오자, 박 대통령은 지난 2013년 6월 17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것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새 정부에서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라며 강력히 문제를 제기했다.
박 대통령은 6ㆍ25 당일까지 총 세 차례에 걸쳐 같은 취지의 발언을 반복하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지난해 2월 박 대통령은 근현대사 서술 부분의 '이념적 편향성'을 두루 손보겠다는 의지를 담아 역사 교과서 발행 체계 개선을 공식화한다. 박 대통령은 "정부의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 많은 사실 오류와 이념적 편향성 논란이 있는 내용은 이런 것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사실에 근거한 균형 잡힌 역사 교과서 개발 등 제도 개선책을 마련해 주기를 바란다"고 지시했다. 정부의 검정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사실상 국정화 추진을 지시한 것이다.
'부친의 역사적 평가'와 결부된 근현대사 사관 재정립 작업은 박 대통령이 정권 초기부터 강력히 밀어붙이려던 핵심과제였지만, 여러 이슈에 묻혀 추진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임기 절반이 지나갔다. 박 대통령의 '제도 개선 지시'가 있은 후 두 달 만에 세월호 참사가 터졌기 때문이다. 또 청와대 문건 유출과 비선라인 논란 등 정치적 이슈가 잇따라 불거지고 지지율이 급락한 것도 박 대통령이 일련의 계획을 유보하게 된 이유다.
12일 교육부의 국정화 방침 발표 후 박 대통령은 13일 방미 출국 및 16일 한미 정상회담 등 일정을 소화하고 18일 귀국한다. 그 사이 이번 이슈에 대한 여론의 추이를 살펴본 뒤 귀국길 전용기 내 간담회 등을 통해 의견을 표명하거나 발을 빼는 전략을 택할 것으로 관측된다. 잠잠하던 역사 교과서 문제는 정치권에서 자생적으로 불거진 것이란 명분도 확보한 만큼, 박 대통령이 개입하지 않을 공간도 마련한 상태다.
<이 기사에는 아시아경제 김보경 기자의 취재가 포함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