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驛)
이 글은 실제 경험을 각색한 글입니다
性相近也 習相遠也 성상근야, 습상원야
성품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관에 따라 멀어진다.
-논어(論語) –
2023년 10월 19일
"헤어지자"
깊이 숙고하고 전화기 너머로 던진 나의 이 한마디에 그녀가 다급히 말한다. "안 그래도 어제 그 일 때문에 오빠가 파혼 이야기할까 봐 걱정했어. 우리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가 오빠 집으로 갈게" 또 만난다면 그녀와 헤어지기 더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틀린 게 아닌 다른 것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했고 이를 억지로 거스를 수 없었다. 결국 그 순간 나 자신을 정확히 마주하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내게 필요하였고 난 그 용기를 내었다.
“경은 씨”
나는 그녀를 ‘경은 씨’라 불렀다.
2022년 초가을
2022년 여름과 가을 사이, 시원함과 후덥지근함이 공존하는 그런 애매한 계절에 우리는 역에서 만났다. 혹시 비가 올지 몰라 나는 우산을 들고 왔었고 그녀는 레인코트를 입고 왔었다. 우리는 웃으며 인사를 하며 같이 한옥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서 대화하며 우리는 서로에게 금세 빠져들기 시작했다. 소개팅을 마무리 짓고 우리는 역에서 헤어졌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 뒤에서 보는 그녀가 입은 베이지 레인코트는 참 예뻤다.
연인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사진처럼 기억에 남는 걸까?
처음에는 나와는 다른 그녀의 성격과 기질에 끌렸다. 뭐든 숙고하고 행동하는 나와 다르게 그녀는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다른 면모에서 서로에게 끌렸던 것 같다.
물론 다르기 때문에 좋았지만 다르기 때문에 힘들 수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2023년 6월 10일
"계약금 걸게요"
갑작스레 한 번 둘러보겠다는 예식장에서 그녀는 결혼 예식장 계약금을 현금으로 걸어버렸다. 결혼에 대한 판단은 같이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결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예식장에서 계약금을 거는 그녀에게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불타는 마음에 물을 끼얹는 행위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그녀에게 왜 상의도 없이 계약금을 걸어버렸냐고 묻지 못했다. 나와 결혼하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나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연인 사이라면 자기 생각을 명확히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이제 알게 되었다. 말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알 수 없다. 결국 얼떨결에 나는 예비 신랑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2023년 7월 15일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이 구도로 찍어야 한다고 말했잖아. 사진 안 이쁘게 나오잖아."
일본 홋카이도 오타루 오르골당에서 나는 연신 사진을 못 찍는다고 타박을 받았다. 넘치는 군중 안에서 혼나는 나의 모습에 화가 끓어올랐다. 무엇보다 해외여행까지 와서 이렇게 혼나야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곳을 나와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이런 연애는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고 결혼 후에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굳이 면박을 줘야 했냐고 나중에 나와서 이야기하면 되지 않았냐는 식의 약간의 다툼이 있었지만 결국 우린 화해를 하였다.
그래... 그래도 그때 힘들었지만 참 행복했었지...
2023년 9월 17일
"OO이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네요."
뒤늦은 상견례 자리에서 예비 장모가 꺼낸 말이었다. 우리 부모님들은 순간 당황해하셨다. 그래도 분위기를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셨다. '애지중지 키운 딸을 명문대 보내고 정년이 보장된 좋은 회사에 보낸 장모 입장에서는 우리 집안이 부족한 집안으로 느껴졌을까? '그렇게 수많은 생각이 날 괴롭혔지만 그 중 가장 마음에 걸린 부분은 바로 예비 장모가 예비 장인을 등지고 한 번도 보지 않았던 모습, 으레 내가 여자 친구와 싸울 때 모습과 100% 일치하였다. 아마 그때부터였을까 ‘이 결혼해도 괜찮은 걸까?'라는 불안한 마음이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2023년 10월 18일
"핸드폰 보여줘. 이 여잔 누구고, 왜 이 여자 동료랑 연락하는 거야? 카카오톡 메시지도 보여줘"
우연히 인스타그램 피드를 그녀에게 보여줬었다. 그러다 직장 동료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부분을 보곤 갑작스레 대화 내용을 다 보여달라고 하더니 급기야 카카오톡 대화 내용도 보여 달라 하였다. 물론 난 당연히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가족과 친구들과의 대화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에 이내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노발대발 화를 내며 집에 가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차를 향해 달려갔다. 대화로 풀고 싶어서 급히 차 앞에 섰지만 그녀는 기어이 자동차 액셀을 밟고야 말았다.
나의 마음속에 이별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별을 선언하기 전 유서를 쓰듯 마음을 글로 정리하였다. 컴퓨터 워드 파일에 나의 마음을 다 적고는 결론을 내릴 때 즈음 결국 난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나다워야 했고 솔직해야 했다.
2023년 10월 19일
"헤어지자"
다음날, 그녀는 나와 헤어질 수 없다 말했다.
그리곤 자기와 함께여서 행복하지 않았냐고, 자신은 늘 나와 함께여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경은씨... 저는 경은씨랑 만나면서 전혀 행복하지가 않았어요. 제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결국 내 덤덤한 목소리에 결국 수화기 넘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2025년 현재
파혼 후 이별과 관련된 많은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며, 결국 자기 자신을 이립(而立)하지 못한 상태로 결혼을 한 것이 이혼하는 대부분 사람의 원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정확히 마주하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이제는 과거의 솔직하지 못했던 나뿐만 아니라 이별하지 못해 고통 받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솔직해지라고, 솔직해서 떠날 사람이면 인연이 아니니 미련 갖지 말라고 일도 사랑도 인간관계에서도 무례하지 않되, 솔직해지라고..
‘그녀는 행복하게 지내고 있겠지?'
’아니 잘 지내고 있을 거야.‘
문득 비가 내리는 어느 날, 출근을 하기 위해 역 안에 들어섰다. 자연스레 베이지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들이 보인다. 그러자 그녀와의 첫 만남이 아련히 떠올랐다. 뒤숭숭해진 마음, '그럼에도 그녀는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겠지? ‘ ’아니 잘 지내고 있을 거야..‘ 그렇게 내 마음을 흔드는 베이지 레인코트를 뒤로 한 채 나는 나만의 길을 걸어 나선다.
이어폰에 나카모리 아키나의 역(驛)이 울려 퍼진다.
https://youtu.be/juRMlWtG-rg?si=2FWNLPEJOg4ZX2hA
駅(Eki) - 나카모리 아키나,1993
見覚えのある レインコート
본 기억이 있는 레인코트
黄昏の駅で 胸が震えた
노을 지는 역에서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어
はやい足どり まぎれもなく
빠른 발걸음, 틀림없이
昔愛してた あの人なのね
틀림없이 예전 사랑했던 그 사람인 걸
懐かしさの一歩手前で
그리움이 밀려오기도 전
こみあげる 苦い思い出に
울컥 솟아오르는 아픈 기억에
言葉がとても見つからないわ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져
あなたがいなくても こうして
당신 없이도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さり気なく 告げたかったのに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주고 싶었는데
중략
それぞれに待つ人のもとへ
각자 서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 곁으로
戻ってゆくのね 気づきもせずに
돌아가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
중략
ラッシュの人波にのまれて
넘쳐나는 인파에 휩쓸려
消えてゆく 後ろ姿が
사라져 가는 뒷모습이
やけに哀しく 心に残る
유난히도 아프게 마음에 남아
改札口を出る頃には
개찰구를 나올 즈음
雨もやみかけた この街に
비도 그쳐 가는 이 거리엔
ありふれた夜がやって来る
언제나 그랬듯 어둠이 찾아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