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
수전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한여름 계곡물소리처럼 맑고 청량하게 들렸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이른 저녁준비를 하기 위해 싱크대 앞에 섰다. 쌀 한 바가지를 퍼서 잡곡을 섞은 뒤 물을 트는 순간 쌀알들이 날개 달린 듯 떠올랐다. 마치 작은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르듯 했다. 가족을 생각하며 쌀을 씻는 내 손놀림도 가벼웠다. 건조한 공기가 반가워지는 가을 오후, 텅 빈 집에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쌀 씻는 일이 그날따라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위암 4기 진단 후 2년 반이 흘렀다. 오직 치료를 위해 친정에서 생활하던 20개월 동안 내 자리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아이들의 숨결, 싸우고 장난치는 소리, 수십 번씩 부르던 ‘엄마’라는 소리가 사무치게 그리워 이를 악물고 치료에 전념했다.
첫째가 태어났을 때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얼른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빨리 크게 해 주세요.’ 매일 밤 간절하게 빌었던 소원이었다. 하지만 시한부 6개월 선고 후 내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인정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빛나는 찰나였음.
“아하하하“
내가 없는 집은 어둡고 온기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웃음소리가 거실과 주방을 가득 채웠다. 신랑과 아들들이 핸드폰 영상을 보고 같이 웃는 소리였다. ‘나만 빼고 즐거워 보이네?‘ ‘나도 같이 놀아달라고 할까?’‘아니면 그냥 옆에 가서 슬쩍 앉아 있어 볼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끼지 못했다. 식탁에 앉아 핸드폰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고 아이들과 신랑을 챙길 수 있는 체력이 되었을 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없는 동안 성장하는 아이들을 남편이 혼자서 잘 챙겨줘 고마웠다. 덕분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돌아와서 아픈 모습 모여주면 부담스러울까 봐 시간을 조금 미뤘을 뿐인데...
‘그렇게 미뤄진 시간이 우리를 멀게 만들었을까 ‘
’ 아니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나를 기다리는 것에 지쳐서일까 ‘
내가 없는 일상에 적응이 된 세 남자는 똘똘 뭉쳐 있었고 내가 돌아와도 그렇게 반가워 보이지 않았다. 20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의 자리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따뜻하게 품어주길 바라는 마음에 서운함도 커져갔다.
얼른 내 자리를 되찾고 싶은 마음에 조급함이 몰려오면 ’하~~~‘하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치료를 위해 배운 호흡법이 감정 조절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위암 4기도 극복한 나인데 이쯤이야.’
‘기다려봐. 결국엔 내 자리 찾을 테니.’
‘조금씩 천천히 하면 돼’
‘친정에서 적응했던 것처럼 하면 돼’
스스로 수없이 다짐했다. 집을 비운 시간만큼 노력이 필요했기에 묵묵히 내 일을 하며 기다렸다.
처음 밥을 할 땐 나를 위한 현미잡곡밥과 아이들과 신랑을 위한 흰쌀밥 두 가지를 준비했다. 남편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목살구이가 상에 올라갈 때면 내가 먹을 알록달록 샐러드도 같이 챙겼다. 두 가지 버전의 상을 차리는 일이 쉽진 않았지만. ‘살아있으니 이것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렇게 3개월이란 시간이 흐르자 그들도 내가 있는 삶에 익숙해졌고 조금씩 내 자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삶은 여전히 외줄 타는 것처럼 위태롭고 불안했다. 잘 버티다가 체력이 떨어지면 마음도 같이 떨어져 쉽게 짜증이 났다. ‘힘들어’‘도와줘’라고 말도 못 하고 꾸역꾸역 버티다 터지기 일쑤였다. 짜증과 잔소리가 쌓이기 시작하자 남편과 아이들의 불만이 늘어갔다. 채소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엄마, 억지로 시키는 엄마를 불편해한다는 말을 신랑을 통해 들었다. 아이들이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그랬는데 내 욕심이 너무 앞었다. 욕심을 부릴수록 아이들과의 관계는 더 멀어졌다. 그럴수록 ‘너 잘못했잖아 ‘라고 혼나는 것 같아 수치스러웠지만 남편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욕심을 버릴수록 몸에 힘이 빠지고 삶이 가벼워졌다.
생각해 보니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준 건 가족이었다. 남편은 재활용이며 청소, 빨래, 설거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둘째는 ‘안아주세요’라며 내 품에 쏘옥 안겨 사랑의 배터리를 충전해 주었다. 자식이지만 그럴 때면 세상 포근한 엄마 품에 안기는 것 같아 좋았다. 아이들을 매일 아침 보고 얼굴, 어깨, 팔을 만질 때면 ‘집에 돌아오길 잘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커가는 아이들의 에너지를 받으며 더 건강해지고 있었다. 그들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그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가족은 정말로 아이러니한 관계이다. 남자 셋 사이에서 서툴지만, 중심을 잡아갔고 더욱더 가족에 대한 감사함을 알게 되었다.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감사한 일임을 두 아들, 남편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는 듯하다.
평소에 누리는 작은 일상이 당연한 게 아님을. 오늘따라 엄마 노릇할 수 있음에 눈물 나게 감사함이 온몸으로 전해져서일까? 쌀을 씻다가 툭 튀어나온 말
“살아 있어, 쌀을 씻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