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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별꽃 May 24. 2020

‘귤껍질’ 향기 맡는 게 뭐 어때서

초록의 위로1


개코가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후각에 예한 편이다. 냄비 밥을 할 때면 냄새만으로도 밥이 익은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맞힌다. 집 현관문 밖에서 나는 냄새로 지금 엄마가 부엌에서 무슨 요리 중인지 알아챈다.


세상의 많은 냄새들 중 내가 좋아하는 건 귤껍질 향기다.


귤을 보면 선물 포장지를 뜯듯이 껍질을 까서는 코에 가까이 댄다. 킁킁.


씁쓸하면서도 상큼한 향이 난다. 천혜향이나 오렌지에서 나는 달콤한 향과는 또 다르다. 냄새를 맡으며 이 귤은 맛있겠구나, 시겠구나 짐작하는 재미가 있다. 맛을 보고 예상이 맞으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내가 치르는 의식을 보고 동생은 귤껍질 성애자가 아니냐고 말한다. 귤껍질 향기 맡고 좋아하는 사람은 언니밖에 없을 거라고. 동생이 뭐라고 할지언정 나는 귤을 코에 갖다댄다.


귤 표면의 주름은 귤이 자라면서 겪은 풍파를 말해준다. 힘주면 부드럽게 갈라지는 건 여리고 자상한 사람을 닮았다. 귤껍질의 폭신폭신한 촉감도 좋다. 껍질 안쪽의 주름진 살구색 살은 나이테 같다.


수박‧참외 껍질과 달리 귤껍질은 활용도가 높다. 전자레인지에 1분 정도 데워 손난로로 쓰는 사람도 있다.


우리 집에서는 귤을 다 먹으면 껍질을 버리지 않고 따로 둔다. 갈색빛을 띄면서 얇아지고 바삭해질 때까지 며칠쯤 말린다. 말린 귤껍질은 차로 끓여 먹는다. 귤보다 훨씬 예쁜 색이 나온다.


펄펄 끓는 귤껍질 차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유리잔에 쪼르르 뜨른 후 투명하면서도 깊은 찻물을 홀짝이면 귤껍질의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진다.


막 깐 귤껍질이 20대 사회초년생 같다면 말린 귤껍질은 60대 아줌마 같다. 상큼하고 새콤한 맛이 거의 사라지고 단물이 빠질 대로 빠졌지만, 담백하면서도 향긋하다. 은은함이 긴 시간 몸을 따뜻이 녹여준다.


향기는 귤껍질에서만 나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서도 난다.


어떤 사람이랑 있으면 별 말 안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또 어떤 사람이랑 있으면 무슨 말이라도 내뱉어야 할 것처럼 불안하다. 한번 보고 다신 마주치지 않고픈 사람도 있고 문득 전화 걸어 목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도 있다. 푹 익어 의뭉스러운 향이 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풋풋해서 기분 좋게 만드는 냄새가 나는 이도 있다.


나는 어떤 향이 나는 사람일까. 이왕이면 귤 껍질 같은 향이었으면 좋겠다. 보면 볼수록 쓰임새가 많은, 따뜻함을 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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