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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별꽃 Aug 08. 2020

늘 마시던 걸로 한 잔 주세요

나를 사랑하는 방법 프롤로그 -2-

NON 알코올 음료를 마시면서 도수 높은 빼갈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찌릿하는 듯한 기분을 느껴본 적 있는가? 난 어젯밤 그랬다. 경제적 상황의 차이에서 오는 박탈감을 제대로 실감해서였다.


10여 명의 동료들과 뒷풀이를 바(BAR)로 갔다. 럼, 진, 칵테일을 비롯해 다양한 리큐어를 파는 고급 술집이었다. ‘강남’의 바에 가 보는 건 처음이었다. 밤 비행기를 탔을 때처럼 남색풍의 어두운 인테리어에 중앙에는 화려한 금빛 조명이 달려있었다. 벽에는 미니 책들이 전시돼있었는데, 대중적인 책은 아니었다. 또 다른 구역을 가면 전면 유리창과 함께 바텐더와 얼굴을 맞댈 수 있는 1인용 바도 있었다.  


어느 정도 비쌀 것을 감안하고 메뉴판을 펼쳤다. 가로는 제품명-용량-금액이, 세로는 제품명이 빽빽하게 나열돼 있었는데 어느 하나도 무슨 뜻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글자크기가 작았던 것도 불편한 이유 중 하나였지만, 다 영어로 돼 있고 숫자 표기양식도 일반 레스토랑이나 술집과 달랐다. 같은 제품이더라도 용량과 샷 수에 따라 금액이 나뉘었는데, 문제는 이 제품이 무슨 맛이고 얼마나 비싼지를 봐도 모르겠다는 거였다.


친구들 일부는 나처럼 어리둥절해했고 또 일부는 메뉴판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자신있게 주문을 했다. 허세를 부리는 건지 정말로 알고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는 경험이 있는 듯 보였다. 누군가가 ‘On the Rock’이라고 얼음을 함께 달라는 주문을 했는데, 난 차후에 설명을 듣고서야 알아들었다.


나비넥타이를 메고 머리칼이 무스로 반짝반짝 빛나는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그를 보면서 뮤지컬 <난타>(<난타>는 내가 안내원 아르바이트를 했던 공연이다)에 나오는 ‘매니저’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는 한 사람씩 주문을 받았다. 내 옆의 친구가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은 음료에 대해 묻자, 웨이터는 메뉴판에는 없지만 원하는 맛을 고르면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딸기맛을 골랐다. 그 뒤를 이어 나를 포함한 3명이 논 알코올 음료를 주문했다.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은 키위 맛을 골랐고 나는 자몽 맛을 택했다.


내가 자몽 맛 음료로 결정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가격 때문이었다. 멜론 맛이 있다기에 그걸로 달라고 했더니 웨이터가 날 보며 슬며시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멜론 맛은 좀 비싸요. 3만 원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나는 3만 원짜리 술은 못 마실 거 같아 보였나? 경고를 해주는 건 고맙지만, 너 비싼 술 마실 능력있어? 라고 묻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심지어 그는 나더러 싼 걸 원하시면...이라며 자몽 맛을 추천했다. 결국 멜론 맛 아닌 자몽 맛을 고르긴 했지만, 그에게 얼굴에 물 뿌려버리고 나올까 하는 상상을 잠깐 했다. 더러웠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금액이 만 원쯤 될까? 하고 아주 잠깐 생각했다.


음료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아는 맛이었다. 태국이나 하와이의 해변에 가면 줄 것 같은 기묘한 무늬의 잔 빼고는 특별할 건 없었다. 인테리어가 주는 분위기에 취해, 같이 있는 사람들과의 대화에 취해 새벽 12시 반까지 시간을 보냈다.       


놀라운 것은, 계산을 할 때였다. 영수증에는 15만 5000원이라고 적혀있었다. 깜짝 놀라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웨이터가 그건 전체 금액이고 내 것은 2만 원이라고 말했다. 옆에 친구들 다 있는데 가격을 밝히는 게 달갑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내역을 자세히 보니 우리가 시킨 술들은 대부분 2만 원이었고, ‘Cover Charge’가 1인당 만 원씩 추가됐다. 커버 차지가 뭐지? 싶었지만 묻진 않았다.  


새벽 시간이라 지하철이 끊겨 택시를 타야했다. 택시를 부르려 앱으로 검색을 했는데 화면에 예상 금액이 2만 5000원으로 떴다. 2만 5000원은 내게 버거웠다. 가뜩이나 술값을 찐~하게 지불하고 나왔는데 택시비까지 쓸 수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비도 안 오는데 따릉이를 탈까라는 생각부터 그냥 찜질방에서 자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동료들 중에는 차를 가져온 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 방향으로 가는 어린 친구들 둘을 맡았다. 또 다른 동료들은 택시를 타겠다고 하고, 나머지 동료들은 집이 근처라 걸어가겠다고 했다. 그들의 계획을 들으면서 슬쩍 버스 앱을 켰다. 천만다행으로 집 근처까지 가는 버스 하나가 아직 운행 중이었다. 1분 후 도착이라는 글씨를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서둘러 인사를 하고 뛰기 시작했다.


그 버스는 원래 지하철을 타면 40분이 걸리는 길을, 1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달렸다. 그래도 내겐 마지막 남은 귀가 수단이었다. 택시비의 50분의 1가량 되는 금액이라는 점이 가장 고마웠다. 버스를 탄지 10분 만에 카톡 하나가 와서 보니, 차를 타고 잘 귀가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카톡을 보낸 이는 매번 만날 때마다 내게 ‘프리하게’ 입고 다닌다며 핀잔을 주던 동생이었다. 그녀는 어제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 가슴부분에 있는 주머니에 명품 브랜드 ‘G’사의 로고가 인쇄돼 있었다. 내가 입는 티셔츠랑은 ‘급’이 달랐다. 그녀는 정장만 입는, 복장 자율화가 안 된 회사에 다닌다고 한다.


반면 그녀에게 처음으로 “왠일로 꾸미고 왔네?”라는 칭찬을 들은 어제의 내 원피스는 2만 9000원짜리였다.


2만 원짜리 술, 택시와 버스, 복장... 버스 창밖을 멍 때리고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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