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저 좀 '충전'해주세요!

닳아버린 건전지 같은 느낌이 들때

by 아임유어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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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대면이 어렵다 보니 화상채팅으로 지인을 만난다. 노트북에 채팅창을 열어놓고 이모티콘으로 화면 콘셉트를 바꿔가면서 대화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연스럽게 근황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대학원에 다니는 한 동생은 새벽부터 온라인으로 강의를 듣는다고 했다. 대학 때 카페 알바를 하면서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던 독한 아이였다.


또 한 친구는 대학원을 다니면서 한 회사의 사장이고 온라인으로 개인 사업까지 한단다. 거기에 내년 초에는 결혼할 예정이라니, 일과 사랑을 동시에 잡은 능력자다. 고등학생 때도 쉬는 시간을 알뜰하게 보내더니 지금까지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열심히 사는구나 싶었다.


그들과 달리 나는 최대한 늦은 시간까지 기상을 미루고,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퇴근 후에는 밥을 먹거나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할 여력이 없다.


버스를 기다리거나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는 동안에는 차창 밖을 바라보거나 멍을 때린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영어단어를 외운다든가 책을 읽는다든가 하는 ‘자기계발’을 내려놓은 지 오래다.


그러나 이런 내게도 꽤나 치열한 시절이 있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4년 전,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였는데 도저히 자습실에만 있을 수 없어 광화문으로 나갔다. 거대한 사람 물결이 주는 기운(?)을 느낀 후 밤늦게 막차를 타고 다시 학교 자습실로 돌아와 공부했다. 그렇게 자습실에서 밤을 새우고 아침에 강의를 들었다.


주로 내가 에어컨과 전등을 켜고 들어갔다가 끄고 나왔다. 그때는 세수도 안 한 다크서클 짙은 눈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자습실 안을 돌아다니는 게 멋인 줄 알았다.


학교에서 집까지 오가는데 드는 시간이 아까워 한 학기를 기숙사에서 보내기도 했다. 기숙사에는 입사생 전용 자습실이 있었는데 좌석 경쟁이 치열했다. 밤늦게 룸메이트들이 잠이 들면 나는 현관문 사이에 신발 하나를 끼워놓고 조용히 자습실로 향했다. 새벽에는 자습실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아무 데나 앉아도 됐다. 나처럼 공부하러 온 1~2명과 마음속으로 의지하면서 공부를 했다.


대학생일 때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많아서 원하는 때에 그걸 다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연예인처럼 스케줄러에 글씨들이 빼곡했다. 시간을 쪼개서 살았다.


예를 들면 연이은 수업 일정 사이의 15분의 짬에도 4~5가지의 일들을 해냈다. 어느 토요일에는 오전에 운동한 후 언어교류 카페에 갔다가 봉사활동을 하러 가고 밤에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23세였을 때, 24세부터 33세까지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를 주제로 ‘꿈 지도’를 만들기까지 했다. 당장 다음 주는 물론이고 앞으로 3개월 후, 6개월 후 무엇을 할지 계획이 차 있었다. 또 그대로 이행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녔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일들을 스스로 준비하고 실행하면서 숨이 차오르긴 했지만 나름의 기쁨을 느꼈다.


아! 이에 앞서 수험생이었을 때에는 귀에 이어폰을 꽂아두고 밥을 먹었다. 이어폰에서는 영어 듣기평가 방송이 흘러나왔다. 가요 대신 그날 푼 모의고사의 문제를 다시 들으면서 오답을 되새겼다. 학원과 집을 오가는 시간에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암기용 노트를 손에 꼭 쥐고 다녔다. 옆 사람 시선은 상관 않고 외워야 할 것들을 중얼거렸다.


생각해보면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나 혼자 안달 나서 그렇게 살았다. 하루에 주어진 시간이 24시간이 아닌 것처럼, 그 하루가 다신 돌아오지 않아도 후회 없을 정도로 열정을 쏟아부었다.


지금은 어떠냐고? 아무 생각이 없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앞으로 3개월 후, 1년 후는 둘째 치고 당장 이번 달, 오늘의 계획도 짜여있지 않다. 흘러가는 대로 살자는 게 삶의 모토가 됐다. 장기적인 일정을 짜기 귀찮아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다.


이전처럼 의욕도 목표도 없다. 엄한 데에 에너지를 낭비하기도 싫다. 공부하거나 자격증을 따거나 투잡을 뛰는 생산적인 투자 외에도 친구를 만나거나 운동을 하거나 여행을 가는 등 나를 위한 여가를 보내는 것조차 귀찮아져 버렸다.


꿈이 사라진 기분이다. 나를 움직이던 건전지가 닳았는데, 새로 갈아 끼울 건전지를 못 구해서 고장 난 상태 그대로 있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찾는 것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자존감을 쌓아간다고 하는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또 내가 어떤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무섭도록 빨리 흐르는 시간을 멍하니 지켜보면서 이렇게 사는 내 인생이 의미 있는 것인지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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