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삿바늘이 안 무서운 순간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by 아임유어엠버

주삿바늘이 안 무서운 순간이 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을 때. 강철처럼 차갑고 단단하던 마음이 흐물흐물해져 누군가에게 온전히 내 몸을 맡기고 기대고 싶을 때.


“조금 따끔할 거에요”


간호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삿바늘이 손등 어딘가를 찔렀다. 신기하게도 어린 시절 주사를 맞을 때 왜 눈물을 흘렸나 싶을 정도로 아프다는 감흥이 없었다.


주먹을 꽉 쥐어보라는 간호사의 말에 손에 힘을 줬지만, 온몸에 힘이 빠졌는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간호사는 가만히 자신의 손으로 내 주먹을 감쌌다. 가뜩이나 작은 손에 영양제 주사가 전봇대 꽂혀 위태로워보였다.


영양제를 맞고 약 기운에 두 시간쯤 푹 자고 나니 그제야 앞서 일어난 일들이 하나둘씩 생각났다.


나는 그날 오전 볼 일을 보려고 변기에 앉았다가 쓰러졌다. 전날엔 일을 하느라고 저녁식사를 걸렀다. 상사가 내 통화습관에 대해 지적한 것을 되뇌며 불면증에 몇 시간을 시달렸다. 3~4시간쯤 잤을까. 기상한 후 눈 주위가 저릴 정도로 피곤하길래 ‘일하기 전에 잠시 눈을 붙여야지’하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불현듯 눈 앞에 파란색 타원 두 개가 나타났다. 그 원들은 노란색으로 변했고 동시에 극심한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초점이 흐려지면서 몸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호흡이 가빠오고 헛구역질도 났다. 뭔가 이상한 느낌에 화장실 문을 연 아빠가 나를 발견했다. 가족들은 손에 힘이 빠진 나를 보고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병원에서 잰 내 혈압은 80(최고혈압)에 50(최저혈압), 저혈압이었다. 의사는 순간적으로 맥박이 느려져 어지러움증이 온 거라고 했다. 또 다른 의사 말로는 어쩌면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미주신경 실조증’ 일수도 있단다. 병명이 뭐든 간에, 살면서 빈혈 한번 없던 내게 이번 일은 큰 ‘사건’이었다. 온갖 피로를 꾸역꾸역 참아낸 몸이 처음으로 ‘아프다’고 표현한 날이었으니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 감정 표현을 극도로 자제하며 살아왔다.


공모전에 당선이 됐을 때는누군가에게 열등감을 안기지 않기 위해 주위에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고, 친구가 가시돋힌 말을 뱉었을 때는 우정에 금이 갈까봐 버럭 화를 내본 적이 없다. 친구들과 의견조율과정에서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을 때도, 상사가 꼰대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스트레스를 주었을 때도 묵묵히 견뎌냈다. 소리 내어 울어본 게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좋은 이미지를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려 말과 행동을 한 후 ‘괜히 그랬다’고 자책하며 초라해지기 싫었다. 감정을 아끼는 대신, 인내하고 타협하는 기술이 늘었다. 그래서 내 몸 안에는 제때 분출되지 못한 많은 감정들이 쌓여있다. 가끔은 내가 감정이 없는 양철로봇인가, 주문 사항을 입력하면 군말없이 척척 해내는 AI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를 억누른 게 내게 도리어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위하면서 정작 나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는 서툴렀던 것이다.


쓰러진 날 오후에 컨디션을 되찾고 난 후, 이모가 병문안을 오셨다.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이제 나도 어른이 다 됐는지 주사가 하나도 안 아프더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모는 피식 웃으며 답하셨다.


“니가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아플수록 아픈 걸 느끼지 못하는 때가 있어.”


순간, 지금까지 마일리지 쌓듯 꾸역꾸역 모아왔던 감정들이 훅 하고 올라왔다. 감정들이 서로 몸 밖으로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입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눈에서는 투명한 액체가 마구 흘러내렸다.


그동안 내 마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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