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15년지기 친구들과 일에 대한 토크를 나누던 중, 내가 이런 말을 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매일 밤 자고픈 대로 많이 잘 수 있고, 끼니도 챙겨가면서 일할 수 있잖아. 4대 보험도 나오고, 퇴직금도 있고.”
실제로 나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새벽까지 졸린 눈을 비비며 일했고, 2년 전에는 끼니 때 조차 전화를 받아야 하는 일을 했다. 회한에 젖어 진심으로 한 말을 두고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고등학교부터 이과의 길에 들어 병원에서 약사를 하고 있는 친구 표현에 의하면 나는 역치가 너무 낮다.
역치는 생물이 외부환경의 변화, 즉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이다. 감각세포에 흥분을 일으킬 수 있는 최소의 자극의 크기를 말하며, 문턱값이라고도 한다.
친구는 내가 회사나 일상에 바라는 게 너무 적다며, 대체 너는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렇게까지 생각하냐고 덧붙였다.
사실 내 역치가 낮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너무도 많은 것들을 갖고 있다.
겨울추위를 피할 수 있는 따뜻한 집, 언제나 나를 제일 걱정해주는 가족, 서로 응원을 건넬 수 있는 친구들. 그 외에도 돈만 있으면 언제든 먹고픈 걸 사먹을 수 있으며, 집에는 온수도 나오고 주차장도 있다. 학교 다니는 걸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지도 않았고 어딘가에 갇혀 지내지도 않았다.
<길 위의 인생> 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히말라야 소년의 꿈’ 이라는 회차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엔 히말라야에 사는 한 소년이 나온다. 소년의 부모님은 짐꾼인데, 장터 상인들이 팔아야 하는 짐을 운반해주고 삯을 받는다. 갓 10살이 넘은 소년은 몸이 아픈 60의 어머니를 도와 짐을 나른다.
짐을 드는 방법은 짐에 천을 매달고, 그 천을 본인 머리에 멘다. 머리의 힘으로 짐을 든다. 그렇게 한 번에 몇십 킬로그램에 이르는 짐을 메고 모자는 산을 넘는다.
일을 끝내고 어머니는 군말없이 잘 버텨준 아들을 위해 그날 번 금액에 해당하는 값의 옷과 목걸이를 사준다. 비싸서 본인 것은 사지 못한다. 아들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얼굴은 행복해보였다.
또 다른 다큐멘터리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험난한 등교를 하는 아이와 아버지들의 모습이 나왔다. 양을 키우면서 근근히 살아가는 산속 깊은 곳의 마을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나이 지긋한 아버지는 자식 학교를 보내기 위해 등에 짐을 이고 길을 나선다. 학교는 차마고도 너머에 있다.
꽁꽁 언 강을 맨발로 건너고, 동굴에서 잠을 자고, 힘들어하는 아이를 다독여가며 걷는 행군의 길은 10일이 넘는다. 발 한번 잘못 디디면 죽을 수도 있는 그 길을 가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식은 자신과 다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식도 그런 부모의 마음을 알기에 기꺼이 고행길을 뒤따른다.
이 다큐멘터리들 속 주인공과 비교하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을 살고 있다. 나도 늘 이렇게 생각해왔던 것은 아니다.
3년 전 취준생이던 나는 속이 곪을 대로 곪아 사람과의 만남을 피하고 있었다. 밥도 혼자 먹고 운동도 혼자 했다.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면서 느끼는 열등감이 불편했고 그렇게 쓰는 시간이 아깝기도 했다. 근황을 묻는 지인들의 연락이 귀찮을 정도였다.
코로나19로 ‘당연한 것들’에 대한 되돌아보기가 활발해졌다. 마스크없이 사는 삶이 소중한 줄을 마스크없이 살 때는 몰랐듯, 생일이나 명절 등 특별한 때가 되면 받는 인사치레가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밥을 사준다고 시간 내라는 이모의 연락, 하루에도 몇 번씩 뭐하는지 묻는 엄마의 연락... 당연한 게 아닌 줄도 모르고 매일 숨을 쉬고 물을 마시듯 허무하게 흘려보냈다.
“누군가 내게 시간을 할애하면 그걸 감사히 여기기.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시간이니까. 곁에 앉은 사람과 좋은 순간을 나누기”
그때 어느 책에서 이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망치로 세게 내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인데, 그걸 왜 몰랐을까. 어둠 속에 숨으려고만 했던 내가 처음으로 후회스러웠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내게 주어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는다. 나를 위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말 한 마디 톡 쏘아 내뱉지 않아야지 다짐한다.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순간순간이 소중한 것임을 알기에 허투루 보낼 수 없다.
잘 버텨준, 또 잘 버텨내고 있는 지금의 내가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