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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별꽃 Jan 24. 2021

내 추억의 가치는 얼마일까?

인생 첫 중고판매! <알라딘>에 가다



한가로운 토요일 오전. 오랫동안 계획해온 ‘임무수행’(?)을 위해 장바구니를 하나 꺼내들었다. 내가 향한 곳은 안방에 있는 책꽂이. 우리 집 책꽂이에는 읽고픈 욕심에 사뒀지만 미처 손길이 닿지 않은 가련한 책들이 가득 꽂혀있다. 


한 권 한 권에는 추억들이 베어있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게 아쉬워서 매일 조금씩 아껴 읽은 ‘엄마를 부탁해’, 언론사 입사를 위해 거금을 들여 받은 수업에서 교재로 쓴 ‘피디마인드’, 대학생 시절 어느 인문학 강연을 들으며 산 ‘법률’...... 집안 정리를 할 때마다 이것들을 확 팔아버릴까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때마다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책이 사라지면 그와 관련된 기억도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바야흐로 중고판매가 대세인 시절이 아닌가! 당근마켓에서 신혼 살림을 저렴하게 장만하기도 하고, 값을 올려받기 위해 명품 운동화를 사서 묵혀두는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않는 책들을 먼지만 쌓이게 계속 두는 건 여러모로 비생산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내 책을 읽고 좋은 영감을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일까? 또 책을 팔아 번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산다면 내게도 얼마나 가치있는 일일까?


나는 내 추억을 팔아 또 다른 추억을 사기로 했다.


선정 기준은 <남을 줘도 아깝지 않은 책>! 난 이미 많이 읽었거나, 혹은 내용이 좋아 추천하고 싶은 것 중에 상태가 깨끗한 걸 골랐다. 장바구니에 책을 담았다가, 다시 책장에 꽂았다가 한 끝에 작업을 끝마쳤다. 그야말로 내 새끼들을 남 주는 심정이었다. .  


10권이 조금 넘는 아이들을 장바구니 하나에 드니 제법 무거웠다. 한쪽 손씩 번갈아들고 낑낑거리면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탔다. 힘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설렜다. 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알라딘>에 도착했다.


와, 거기에는 이미 중고판매의 맛을 아는 손님들이 가득했다. 나는 첫 경험인지라 번호표를 뽑고 구석에서 다른 사람이 하는 걸 구경했다. 


내 차례 바로 앞의 아줌마 고객은 남편, 아이와 함께 왔는데 고수 중의 고수인 모양이었다. 캠핑 때 쓰는 카트를 끌고 왔는데 동화책 시리즈며, 영어 원서 등 각종 책들이 빼곡했다. 고객은 직원이 책의 등록을 마칠 때마다 카트 안의 책을 계산대 옆 선반으로 계속 올렸다. 3열로 쌓아 위로 10권 정도씩 올렸는데도 카트에 책이 수두룩한 걸 봐서는 최소 100권은 넘어  보였다.


10권 조금 넘는 책들을 고르는 데도 버거웠던 나로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 세계를 너무 몰랐구나 싶어 고개가 절로 숙여질 정도였다. 매장에 있는 직원 3명 모두가 달려들어 책을 선별했는데도 시간이 30분 정도가 걸렸다. 고객과 가족들은 모든 책을 다 팔고는 뿌듯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평가’ 받는다는 것은 긴장감과 설렘을 동시에 준다. 내 책들은 얼마의 값어치를 받을까. 책의 원래 값도, 책마다 담긴 추억의 무게감도 각기 다르겠지만 중고매장에서는 아주 명확한 기준으로 값이 매겨진다. 바로 ‘누군가에게 팔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하냐’다. 


전학을 가서 처음 자기소개를 할 때, 이직을 해서 새로운 회사에서 면접을 볼 때, 재혼을 할 때 등등 사람이 기존의 활동범위에서 벗어나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쓰이게 될 때에도 중요한 평가 기준은 이와 별반 다르지 않겠구나 싶었다. 


접수된 책의 분류는 최상. 상. 중 세 가지였다. 최상은 6000원 이상, 상은 3000원 정도, 중은 1000원 대의 돈으로 매겨졌다. 내가 가져온 책 중 1권은 ‘최상’, 두 권은 ‘상’, 3권은 ‘중’ 등급에 속했다. 그래도 3~4만 원은 받을 수 있겠지 했는데, 수중에 들어온 돈은 만 2천원이어서 조금 실망스러웠다.  


‘중’으로 분류된 책 한 권은 택배로 받은 후 읽지도 않은 상태였는데, 몇 장의 끝부분이 살짝 접혀있다고 ‘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꼼꼼히 확인해서 가져올 걸. 요령이 부족했던 게 아쉬웠다.


열심히 여물 먹여 키운 소를 가족들 반대 뿌리치고 시장에 내다팔았는데, 높은 값을 받지 못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심지어 나머지 6권은 아예 팔지도 못했다. 이유를 물으니 이미 서점에 많이 있는 중고 책이라서 굳이 더 받을 필요가 없단다. 참나, 매물이 많으면 수요가 떨어지는 시장의 원리가 중고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거구나. 중고매장에서도 팔리지 못하는 책들에 감정이입이 됐는지 조금 슬퍼졌다.


“이 책들은 저희가 버려드릴까요?”


“아니요, 제가 가져갈게요.”


안 팔린 책들을 다시 장바구니에 넣고 두 손 무겁게 귀가했다. 너희들을 품어줄 건 이제 나밖에 없구나. 그래, 앞으로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전까지는 나와 함께 하자! 너희의 가치는 이제부터 다시 매겨지는 거야!! 


나는 다시 책장에 책들을 꽂으면서 책들을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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