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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두려움이 경외감을 만든다

by 하얀늑대

교회를 다니고 , 주일에 목사님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면서 살아온 시절이 꽤 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교회 안과 밖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고 교제했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의외로 ... 하나님에 대해서 적절한 수준의 두려움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을 만난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잠언 1장 29절 부터의 말씀이다. "대저 너희가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며 , 나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나의 모든 책망을 업신여겼음이니라. 그러므로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자기 꾀에 배부르리라." ...


손을 다쳐서 시간을 나름 보내는 동안에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았다. 지혜의 문헌인 잠언에서도 이야기 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훈과 책망을 우습게 여겼다고 ...


사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나 책망 , 노여움 , 분노 ... 이런 것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 안하려고 한다. 페이스북 같은 곳에서 하나님의 징벌이나 책망 같은 얘기를 주제로 글을 쓰면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이 딱 티가 난다. 대신에 "맛있는 케잌을 놓고서 하나님과 달콤한 데이트..." 이런 걸 주제로 사진을 올리면 좋아요가 마구 달린다 ㅎㅎ ...


헌데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기뻐하는지만 알아서는 제대로 파악이 안된다.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 무엇에 분노하는지 , 무엇을 피하려고 하는지 ... 내가 알고자 하고 ,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예를 들어서 데이트 시간에 맨날 늦고 , 거친 욕을 입에 다는 것을 여친이 무지하게 싫어하는데 그런 것은 가뿐하게 무시하고는 계속해서 여친이 좋아하는 맛집만 데리고 다닌다고 과연 그 연애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나? 오히려 정말 관계를 제대로 끌고 가고 싶다면 '상대가 싫어하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가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이해하고 싶다면 구약을 보면 된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이 인간에 가지고 있었던 기대가 무너져 내리고 , 참고 참다가 결국에는 그 인간을 징벌하는 내용으로 가득차있다. 필자는 성경을 나름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 구약성서를 정말 깊이 있게 읽겠다고 들어가 보고는 많이 놀랐다.


주일설교시간에 주로 이야기 되는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보다도 인간에게 실망하고서는 그 인간을 징벌하고 , 인간은 그제서야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순종의 자세로 돌아서고 ... 그러다가 또 느슨해져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증스럽게 살다가 하나님에게 또 두들겨 맞고 ... 이런 스토리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이 구약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에 대해서 실감했었다.


하나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는 것 ... 이건 하나님을 피해서 숨으라는 얘기와는 다른거다. 오히려 반대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이 절대로 금지했던 선악과를 먹었을때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해서 숨었다. 무서워서 숨었다. 하나님을 피해 숨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졌을때 벌어지는 현상이고 , 성경을 이것을 원죄라고 이야기한다.


죄를 짓는 행위보다 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 하나님을 기피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해서 하나님은 이후 '제사'라는 제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 , 그것을 용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하나님을 무서워서 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뜻의 엄중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얘기와 일맥 상통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 하나님이 주신 계명중의 계명이라는 십계명이 있다. 그리고 그 십계명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 백성들 사이에서의 관계' 로 나누어진다고 이야기 한다.


헌데 사람들은 그 계명의 참 의미를 이해하고 ,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을 잘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네 이웃에 대해서 거짓증거 하지 말아라" 라는 계명이 있다. 아마도 이 계명만 제대로 지켜진다고 하면 세상에서 억울한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 것 같다.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 그들이 이 계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도 더 좋은 법들이 만들어 졌을 것이다. ( 아마도 유죄를 무죄로 만들 수 있는 많은 변호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율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


헌데 대체로 보면 ... 남들에게 법을 지키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많지만 , 스스로 그 법의 의미를 깊이 연구하고 고민하면서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요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옛날도 그랬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욕했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남들에게만 강요하고 , 그 가운데서 자신들의 이익과 권위에만 집착한다고 말이다 ...


사실 성경의 말씀은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정말 대단하다. 내 삶을 바꾸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나는 살아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내가 그 말씀의 엄중함을 외면하고 자꾸 내가 듣고 싶은 얘기만 들으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을 올바로 경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필자의 직업중에 컨설팅도 나름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다. 헌데 뭔가 컨설팅을 해 주기 위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필자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사람보다 , 자신이 듣고 싶은 얘기만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정말 중요한 주제가 되는 내용은 패스해 버리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만 극대화해서 이용하는 ( 아마도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쓰여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 경우가 더 많더라는 거지.


헌데 그런 식으로는 내가 가진 노하우가 제대로 전달되고 적용될 리가 없다. 자신의 고정관념에 맞지 않고 , 지금까지 자신의 방법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 나름 전문가라면 그것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서 자신의 것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잘 없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적어도 그러면 안된다. 자신이 보기에 정말 잔인해 보이고 , 너무 심하다 싶은 모습이 성경상에 비추어 보이더라도 그것을 외면하고 자신이 보기에 좋은 말씀 ( 예를 들면 시편 23편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데 ... 바로 그 앞의 22편이 얼마나 처절한 내용이 적혀 있는지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외면한다 ) 만을 가까이 하려고 한다면 ... 앞에서 적은 바 잠언 1장의 말씀처럼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모습이 그려지게 될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자기 좋을대로 생각하고 싶어하는 것은 많은 경우가 하나님의 책망을 듣기 싫어하고 ,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의 삶의 모습이 바뀌는 것에 대해서 본능적인 거부반응을 보이게 될 때가 많은데 ... 그것을 하나님이 꺾으시려면 결국 고난 밖에는 방법이 없더라. 고난을 통해서 거부할 힘 까지 다 빠진 다음에야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 그 말씀대로 살겠다는 마음의 결심을 하더라. 이건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딱 그랬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을 많이 본다.


필자도 손을 다친 시간동안 ... 나름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나름 고난이라면 고난스러운 시간이지만 ... 그 시간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저항하거나 반항하기 보다는 경외감으로 한 걸음 다가설 수 있었던 시간이어서 ... 참 감사하다. 이런 마음으로 평생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의 손에 남은 커다란 흉터가 필자에게는 참 소중하다. 그 흉터를 보면서 그 시절 하나님이 나와 어떻게 동행하셨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만한 계기를 이 손의 상처가 만들어 준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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