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에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수종드니라 ( 마태복음 4장 8절에서 11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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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소시적에 예수를 믿을때는 정말 잘 이해가 안 갔던 귀절이기도 하다. 사실 이 구절이 정말로 마음을 때리기 위해서는 "아니 그냥 한번 절하면 온 세상이 다 내것이 되는 건데 , 그렇게 절해서 낼름 먹고는 그걸로 하나님 일 열심히 하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이지 않아?" 라는 생각을 버려야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사실 하나님의 일은 효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향유 담은 옥합을 깨트린 여인은 경제 효율적으로 보면 꽝이다. 경제 효율을 따지자면 이를 비판했던 가롯 유다의 말이 더 타당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롯 유다를 물리치시고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죄를 사하시고 입맞춰 주셨다. )
깊이 있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 잘되고 , 나 좋기 위해서 예수도 믿는 건데 , 나에게 현실적으로 아무런 유익도 돌아오지 않고 , 도리어 예수를 믿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당한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면 내가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다" 라는 수준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하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내가 세상에서 좀 더 잘 살아보고자 하는 입장을 넘어서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이더라.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교회 같은 경우에는 압축된 경제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과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딛고 부를 축적하는 과정과 교회의 급속한 성장이 그 궤를 같이 했다. 그러면서 부의 성장과 은혜의 풍성함이 많은 부분 동일시 되는 과정을 거쳤다. 지금의 50대 중 후반 이후 나이의 신자들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거의 그런 복음을 들으며 신앙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헌데 말이다 ... 요즈음 들어서 우리나라 교회의 성장세가 꺾이고 , 급속도로 규모가 축소되어 지고 ... 그 가운데에서 교회와 목회자의 도덕적인 문제가 들춰지면서 지금까지 교인들이 믿고 있던 "교리"에 대해서도 과연 그렇게 믿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그 비판의 소리에 상당부분 공감하게 되면서 , 과거에 필자가 믿었던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고 또한 앞으로도 가질 것 같다.
사실 ... 저 위에 적은 마태복음 4장의 말씀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사람중의 하나가 필자였다. 필자는 예수만 믿으면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든든한 빽이 생기는 줄 알았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 내게 능치못할 일이 없을 것 처럼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믿는 자들이 세상에 번성하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것이고 ,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 헌데 그런 사람이 필자만은 아니더라 ㅎㅎ . 어떤 고삐리의 얘기를 들었는데 , 앞으로 신학을 하고 싶어한다고 하더라. 헌데 그 고삐리가 가지고 있는 기도제목이 "세계 정복" 이란다.... 물론 그럴만한 재능도 돈도 능력도 없다. 하나님의 빽을 써서 자신이 세상의 왕이 되고 싶다는 얘기 아니겠어? ㅎ - 헌데 아마 그런 사람들 은근히 세상에 많을 것 같긴 하다. 하나님 능력을 빌어서 재벌 2세 ... 가 기도제목인 중2들 ... 몇명은 되지 않을까? )
헌데 ...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는데 ... 능치 못할 일이 없기는 커녕 필자는 필자 한명의 앞가름도 제대로 못하는 찐따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어진 일은 많지 않고 ...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은 늘 필자의 앞에 놓여졌던 것 같다. 그러면서 필자가 소시적에 믿으면서 바라고 구하던 행복과 번영과는 멀어졌다. 헌데 이런 느낌을 가지고 시대를 사는 사람은 필자만은 아니더라는 거다.
해서 소시적에 성경을 읽으면서 보이지 않던 것들도 보이게 되었다. 예수님이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싹 쓸어 버릴 수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면서 ,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적절한 대접도 못받고 ,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 의해서 세상에서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럽게 돌아가신 삶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고 할까?
솔직히 예전에는 "아니 성경에 보면 말씀 만으로 마귀가 도망가고 천사를 불러 올 수 있고, 천국에도 다녀오실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인데 , 마음만 먹으면 말씀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으실 능력 있으신 분이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다 가신건가?" 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헌데 그 시절에는 내가 내 마음의 속을 제대로 보지 못했었다. 나는 정말로 예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고 ,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었고 ,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는 거다.
"... 나는 결국 예수님이 중요한 게 아니고 ,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하나님을 통해서 내가 바라던 것을 성취하는 것이 중요했고 , 하나님의 뺵으로 남들보다 더 성공하고 더 많이 벌고 더 높아지는 것을 바랬었지 , 내가 바란 것은 예수님의 삶에 동참하고 그분이 당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었다" 라는 거지... 풀어 얘기하자면 , 그 시절의 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덕 , 예수님 덕을 보고 싶었던 거지 그 분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었다....
나는 내가 유력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 내가 남들이 우러러 보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고 , 내가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즐기는 와중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고 , 하늘나라의 백성의 도리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하나님은 나에게 하루 하루의 일상과 매번 내 앞에 던져지는 힘겨운 일들을 성령님과 동행하는 가운데에서 견뎌내고 살아내기를 바랬을 뿐 ... 내가 바라는 것들이 현실로 성취되어지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으신 것 같은 ( 아직은 인생 다 산것 아니지만 , 적어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느끼기는 ) 생각이 들게 되더라.
이러한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이런 식으로 해야 했더라는 거다.
' ... 네 하나님. 당신이 옳습니다. 당신이 맞습니다. 당신이 의롭습니다. 저는 그 의로움에 도저히 따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기는 커녕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제 욕심과 제 야망을 따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아무리 미사여구를 첨부하고 , 교회에서 쓰이는 용어와 성경에서 나오는 문장으로 제 언행을 치장하여도 저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온전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 아무래도 이번 인생은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소시적 바라던 영광과 풍요의 삶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저는 제 소신껏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소신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것 같네요 . 지금 부터는 제 소신 제 바램 다 내려놓고 하나님 뜻 대로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럴 능력도 힘도 없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 주세요 ... 제가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 헌데 말이다. 삶의 이런 저런 고난 앞에서 위에 적힌 뉘앙스의 기도를 하면서 , 그 때서야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더라는 거다. 하나님이 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고생을 하셨는지 조금씩 조금씩 더 깨달아지면서 , 그것이 나의 삶을 조금씩 바꾸어 놓더라는 것이지.
물론 저 위에 적은 기도는 주문이 아니다. 한번 송창하기면 하면 되어지는 주술이 아니다. 한번 기도를 하기만 하면 짠~ 하고 인생이 바뀌는 것은 아니더라. 하지만 매번 새로운 고난거리가 내 앞을 가로 막을 때 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터이니 아버지의 뜻 대로 해 주세요' 라고 무릎꿇고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은 맞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세월이 쌓이고 쌓이면서 보니 ...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어진 것 같다. ( 물론 한창 멀었다. 필자의 두뇌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하지만 조금씩 깊이 알게 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
즉 우리가 우리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으로 부터 얻어내는 신학과 과감하게 결별하고 ,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신학으로 전환하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삶에 녹아들어 갈 때에 복 받기를 구하는 신앙으로 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살아질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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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서 생각해 본다면 필자에게는 이 깨달음이 경계선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해 주었으면 하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 이 아니라 , "내가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따르며 살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하나님" 으로 전환하는 과정 말이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그제서야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얘기가 어떤 것인지 깨달아졌다. ( 솔직히 하나님이 나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 나는 하나님에게 언제나 뭔가를 청구하던 신앙이었더라는 게 느껴졌다 )
그렇게 깨달아 지고 나니까 ... '내가 하나님을 마치 램프의 요정 지니 처럼 ,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소원을 들어주는 전지전능한 존재' 처럼 생각했던 것들이 깨달아져서 많이 부끄러웠다. 정작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독생자의 목숨을 내어 주시기 까지 했는데도 불구하고 , 나는 그것만으로 모자라다 ... 내가 바라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 나는 이것이 지금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 ... 라는 이야기만 했던 모습이 객관적으로 보여지게 되더라 ... 뭐 이런 얘기.
물론 지금 하나님에게 이거 저거 바라는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느냐? 라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내 욕심이라고 생각이 들 때에는 정말 내려놓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솔직히 ... 어느 정도는 인간은 하나님에게 자신이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일 수 밖에 없다고도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 기복신앙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제 아무리 자기 자신에게 엄격했던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 지금 자신의 자녀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 처해서 수술실로 들어가고 있다라고 셈 치자. 하나님에게 "제발 하나님 수술이 성공하게 해 주세요. 제 자식의 목숨을 구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나? 그 상황에서 "자식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하는 기도는 기복신앙이야" 라고 고개 뻣뻣이 드는 것이 맞는가? 필자는 오히려 그런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내세우는 교만" 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러면 또 인간은 헷갈린다. 과연 자신의 바램을 구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 사실 '이렇게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어려울 것 같다. 어쩌면 평생 헤메이면서 살아갈 것 같다. 부끄럽긴 하지만 필자의 능력이 그거 밖에 안될 줄을 필자도 이제 감 잡았다...
아마도 능력있는 신학자라면 이 부분에 대한 대답을 명쾌하게 내려 줄 수 있을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는 남은 인생 얼마나 될 지 모르겠지만 그 기간 내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 그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구하며 십자가 만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지만 또한 내가 부족하고 결핍된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 간구하기를 왔다갔다 할 것 같더라..." 는 거다.
하지만 그렇게 왔다 갔다 하면서 깨달음은 깊어지는 것 같다. 경험과 깨달음이 쌓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하나님에게 구하여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이 쌓이는 느낌은 확실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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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다 살아가는 모습은 다르다. 일란성 쌍동이라도 다 생각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다. 천명의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천가지의 각기 다른 생각과 사연이 있더라. 하지만 적어도 천명의 믿는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그들이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바램과 욕심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 그것을 포기하고 ,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나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른지를 묻는' 과정은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의 모습이 다를 수는 있다. 각자 내려놓는 것들도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허영을 내려놓아야 할 지도 모르고 , 어떤 사람은 열등감을 내려 놓아야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어릴적의 트라우마를 내려놓아야 할 수 있고 ,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야망을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자아를 직시하고 , 자신의 자아가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인정하고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걸림돌이었다는 깨달음이 오게 되면 그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자기 부정의 과정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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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글에서 필자는 "복을 받은자와 고난을 받은자가 서로 소통하면서 위로하는 모습" 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사실 부유하고 여유있는 사람들에게도 걱정거리는 많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갑자기 사라지게 될른지에 대한 고민은 어쩌면 가난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 수록 그 고민은 커진다.
어쩌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 회사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실직할 때 받게 되는 절망감은 일용직이나 아르바이트가 일을 짤렸을때 받는 절망감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해서 회사의 임원들이 퇴사하게 되면 급격하게 늙고 건강을 잃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 건강을 돌볼 시간이 많아졌을 터인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부자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동네에서 이사가는 것들을 극히 두려워하는 성향이 있다. 그들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형성된 인맥에서 이탈하는 것은 곧 인생이 거꾸러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 물론 가벼운 마음으로 부자동네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
해서 서울 강남의 부자동네의 집 값이 8억에서 15억 넘고 이십 몇억을 찍어도 매물은 의외로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게 단순히 양도세 때문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 정도로 집값이 많이 오르면 양도세는 상쇄하고도 남은 수입이 생긴다. 그네들은 그 부자동네에서 떠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 지역에서 다져진 인맥을 떠나는 것과 함께 , 그 인맥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고급정보와 유대감으로 부터 멀어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한 두려움은 자신의 마음속의 욕심과 바램을 직시하고 그것을 십자가 앞에 가져가는 데 어려움을 만든다.
마치 지위를 잃기 싫어하는 회사 고위직처럼 , 자신의 지적 권위의 손상을 두려워 하는 대학교수처럼 ,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기 싫어하는 정치인 처럼 ... 한번 손에 들어온 것을 내려놓는 것은 실은 그것을 손에 쥐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집착'을 만들어 내는 걸 필자는 많이 봤다.
그리고 ...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는 그러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되어서나 가능하더라는 거다. 물론 아주 이례적으로 자신이 가진 것들을 잃어버리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도 있지만 ... 정말 그런 사람들은 대단한 사람들이고 ,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어버린 다음에서야 '이 세상에서 내가 지금껏 가지고 있던 것들이 실제로 내 것이 아니었구나'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물론 그러고 난 다음에는 여러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지. 세상의 허무함에 몸서리치며 늙어가는 사람도 있고 , 정치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며 원망과 증오를 불태우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믿는 사람이라면 그 시간은 기도해야 할 시간이고 ,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고 그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느끼면서 , 내 것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도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 모든 것을 주시기도 하고 거두기도 하시는 준엄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하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하나님이 줬다 뺏는 거 치사하지 않냐고? 아니 하나님이 사람에게 빚진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 하나님이 그거 하나 마음대로 못하면 어디 하나님인가? 그리고 하나님에게 사랑받던 수 많은 인물들이 성경에 있는데 , 그들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도 하고 벌을 주시기도 하고 , 소유를 풍성하게 하시기도 하고 쫄딱 망하게 하시기도 하는 이야기가 그득하다. 자신은 왜 예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이 할 일을 허락받고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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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말이다 ... 이런 깨달음이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나눠 보면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들을 느낀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자녀가 불치의 병에서 기적적으로 치유된 것을 경험한 부모와 자녀를 허무하게 잃어버리고 정말 '가슴에 자식을 묻은' 부모가 화합할 수 있다. 자신의 소유가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게 사용할 마음을 늘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과 지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잃어버리고 상실감에 빠져 있는 사람이 화합할 수 있다. ( 당장에 돈을 얼마 주는 것 같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
이것이 약하나마 하나님이 바라시는 천국의 모습과 조금은 가까운 모습이 아닐까 ... 하고 생각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천국은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 이 아닐 것 같다. 사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리고 누군가가 꿈을 이루게 되면 누군가는 그 사람에게 밀려서 자신의 꿈을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 세상살이다. 누군가가 서울대에 합격을 하면 누군가는 불합격 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니까 말이다. 그러기에 필자는 모두가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믿지도 않거니와 바람직 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화평을 이루는 것은 천국의 모습과 상당히 닮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이루기 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을 수도 있는 모습을 가진 곳. 자신의 바램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는 곳. 누군가의 위에 올라서기 위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지 않아도 되는 곳 ... 그런 곳이 천국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게 되었다.
"....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 이사야서 11장 6절에서 9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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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런 세상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각박한 세상이 되면 되었지 앞으로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말이다 ... 세상을 살아가면서 복을 받은 자와 고난을 터널을 지나는 자가 서로 화평하고 소통하는 모습은 기대하고 싶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의 처지를 헤아려서 고아와 과부라 할 지라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모습 말이다. ( 해서 필자는 교회가 교회 안의 고아와 과부 같은 사람을 돌보는 역할을 하는 것에는 찬성하고 싶다 )
그리고 그런 소통은 ... 사실 비슷한 고난을 경험해 본 사람에 의해서 가능한 것 같다. 눈 높이를 맞추고 고난을 위로하고 그 안에서 깊이 있는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겸손은 ... 사실 고난을 경험하는 과정이 아니라면 가지기 어렵지 않나 ... 하는 생각을 해 보네 .
해서 나름 이번 글의 결론. 고난이라는 것을 솔직히 권장하는 것은 말도 안되고 , 솔직히 필자도 고난을 경험해야 한다고 하면 제일 먼저 도망가는 대열에 설 수 있는 사람이지만 ... 고난을 통해서 '내 것이 내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고 내가 하나님 백성 되는 것은 내 욕심을 직시하고 십자가 앞에 내려놓을 때 가능한데 ... 그게 고난 없이 알아서 내지는 공부해서 되는 일은 아니더라. 그렇게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권면할 때 ... 이사야서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은 세상의 모습이 조금은 이루어지지 않을까 ... 말이다.
너무 기독교스러운 글이라고 생각할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
헌데 이번 '손을 다치다' 는 그렇게 쓰려고 작정했던 글이니 만큼 ... 이해 바란다.
대신 이 글을 쓴 필자의 마음은 ... 진심이니까 말이다.
PS. 사실 권면이라는 것이 ... 가난을 구제해서 중산층으로 만들라는 얘기가 아니다. 탈무드에 보면 어떤 사람이 극심한 어려움에 닥쳐 있을 때 , 그 고통의 1/60 정도만 덜어 주더라도 그것은 매우 큰 선행을 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필자도 그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정말 죽을 것 같은 고난에 처해있을 때 ... 저 정도라도 그 사람의 어려움을 덜어주게 된다면 ... 그것은 아마도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는 선행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 사람에게 살 집을 한채 구해주는 정도의 선행이 아니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