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매우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재산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
제자들이 이 말슴을 듣고 매우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 마태복음 19장에서 )
사실 필자의 정치적은 성향은 살짝 좌파에 가깝다. 우파적인 성향도 매우 많은 편이지만 심증적으로 기울어지기를 좌파쪽에 살짝 기울어져 있다고 할까? 수치로 얘기하자면 52 : 48 정도?? 물론 필자가 출석하는 교회가 꽤 보수적인 성향인지라 , 그곳에서 만나진 사람들의 눈에는 완전히 빨갱이로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부동산 갭투자는 과연 성경적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 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 조금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과연 투자라는 것은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이고 , 그 투자라는 것을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지 ... 그리고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투자와 근현대 자본주의에서 행해지는 투자는 과연 같은 개념인지 ... 에 대해서 생각을 좀 정리해 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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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성경에서 보면 이자를 받지 말라는 얘기는 꽤 많다. 해서 이슬람교에서는 공식적으로 금융업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해서 금융업을 하는 회사들은 전부 해외에 근거를 두고 활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같은거냐고 묻는 분들도 있을텐데 ... 실제로 구약성경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통이다. 그리고 이슬람교에서 이야기하는 알라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여호와는 동일 대상이다. ( 이 부분은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종교사의 영역이기도 하니까 )
레위기 25장을 살펴 보자.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주지 말라"
신명기 23장은 조금 더 구체적이다.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것이라.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필자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청동기시대에 이런 법들이 있을 수 있을까 ... 하는 감탄을 해 본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여기도 보면 그 사회를 움직이는 원칙이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 정교함에 놀랄 수 밖에 없더라는 얘기인데 ... 그 이유를 설명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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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 어떤 마을에는 돈이 총 100만원이 있다고 가정하고 , 그 돈은 A 라는 사람이 다 가지고 있다고 셈 치자. 그리고 그 마을에는 A 와 B 와 C가 있다고 가정하자. B 라는 사람이 A 라는 사람으로 부터 돈을 50을 빌렸다고 하자. 그리고 이자로는 10% 인 5만원을 받기로 하고 ...
A 는 C 에게 50만원을 주고 농기구를 사들인다. 그리고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C 에게 농산물을 팔아서 C 로 부터 50만원을 지불받는다. 헌데 빚을 갚으려고 해 보니 ... 이자를 낼 돈이 없는거다. 왜냐구? 그 마을에 있는 돈 중에서 A 가 가지고 있는 돈을 제외한 모든 돈을 벌어온다 하더라도 이자를 낼 돈이 없는거다.
따라서 B가 빚을 갚기 위해서는 A에게 물건을 팔든지 , 아니면 A에게 이자를 낼 돈을 또 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얘기가 된다. 즉 이것은 A는 B에 대해서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뭐냐고?? A 가 B의 물건을 하나도 사 주지 않으면 B는 이자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서 A에게 어떤 갑질을 당하더라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만일 A가 세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샤일록과 같은 잔인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B가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서 B의 전재산을 꿀꺽 할 수 있는 흉계를 꾸밀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조금 극단적인 얘기를 하자면 그러하다.
해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이자로 빚을 갚을 수 있을 만큼의 유동성을 계속 사회에 공급해야 한다. 그래야 빚을 진 사람이 이자를 갚을 수 있을 돈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계속해서 화폐의 가치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헌데 구약성경 당시는 화폐발행이라는 개념이 없더라는 거다. 그러니 경제를 원활하게 돌리면서 사회가 붕괴되지 않기 위해서는 돈을 빌려주되 이자를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거지.
구약성경이 쓰여지는 당시는 상당히 폐쇄적인 사회이다. 지금처럼 정교한 금융기법은 존재하지 않았고 , 그저 돈을 빌려주고 돈을 갚는 정도가 최선의 금융이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헌데 그 시절에도 이자라는 개념은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신명기에도 이자라는 단어가 등장을 하지 ...
헌데 그 시절의 율법은 폐쇠된 공간 안에서 이자를 받는 일이 생기게 되면 "형제"라는 관계가 깨어진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해서 형제에게 꾸어주는 것은 절대 이자를 받으면 안되었다. 왜냐구? 폐쇠된 사회에서 이자를 받게 되면 인간관계가 끊어지고 상하관계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율법을 제정한 주체 ( 하나님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 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헌데 이방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경우에 대해서는 이자를 허용했다. 이것은 이자라는 개념에 대해서 성경이 그렇게 '사회악'으로만 접근하지 않았던 것을 이야기 한다고 풀이할 수 있을 것 같다. 즉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이 위해서는 이자라는 개념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율법을 제정한 어르신(?) 도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왜냐구??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돈을 빌려 주지 않으면 경제는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돈을 빌려주지도 않고 , 돈을 꿔 주지도 않으면 경제는 마비가 오게 된다. 경제의 본질을 파다보면 결국 경제의 본질을 '빚' 이더라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사실 이 '빚'이라는 것이 있기에 경제는 돌아갈 수 있다. ( 사실 이자가 없다면 누가 떼어먹힐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나? )
아마도 빚독촉에 시달려 본 사람들이거나 , 은행 이자로 자신이 벌어들인 월급의 절반 가까이를 떼어 본 사람의 경우에는 이런 개념을 쉽게 납득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사실이다. 빚이 있기에 현대 사회는 지탱할 수 있고 , 서민들이 오히려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만들어 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빚이 없다면 회사라는 개념이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빚이 없다면 아마 소규모 공방 정도만 즐비한 사회 정도만 되지 않았을까?
빚이 없다면 아파트는 존재 가능했을까?
빚이 없다면 학교 , 병원 .... 이런 개념들이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빚이 없다면 우리들이 편리하게 사용하는 문명의 이기들과 문화들이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필자는 어렵다고 본다.
가까운 예를 들어보면 근대에 들어서 일반 시민들의 권리가 신장된 것은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의 발달에 상당부분 기인한다. 특히 총기의 발명은 전쟁의 양상을 극적으로 바꾸었고 , 그로 말미암아 근대의 계급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왜냐구??? 총이 없던 시절에는 기사들이 철갑으로 두르고 말 타고 뛰어들어서 병사들을 유린해도 병사들은 속절없이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영국의 롱보우가 나타나면서 전쟁의 형태가 바뀌었지만 롱보우는 실전에서 써먹을 정도의 숙련도를 만들어 내려면 너무 긴 시간을 요구했다. 헌데 총이 나타나면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양성할 수 있었고 , 농가의 촌부라도 총을 쏠 줄 알면 말 타고 돌격하는 귀족기사들을 총 한방으로 보내 버릴 수 있었으니깐....
총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자본의 축적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빚이라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 빚는 누군가의 권한을 만들고 누군가의 책임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근대사회 이후 빚을 갚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 근간을 뒤흔드는 죄악으로 간주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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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좌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이런 부분은 쉽게 다가오지 않으리라는 것 잘 안다. 필자도 사실 천민자본주의를 그 누구보다도 싫어한다. 하지만 그 근본을 따지고 들어가면 성경에서는 자본주의의 근간이 되는 개념 -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 - 의 약점을 알고 있지만 또한 그것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여기에서 출발해서 지금의 부동산의 상황을 좀 더 깊게 생각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