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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늑대 Dec 08. 2018

주류에서 벗어난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것

과연 우리나라 입시교육에는 희망이 있을까?

앞선 글에서 필자는 학부모들이 먼저 자신의 내면의 무의식의 세계에 자리잡고 있는 감정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들추어내고, 가능하면 떠나보내고 안되더라도 적어도 영향력은 줄이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적었다. 나름 고심 고심하면서 내린 결론이다.


뭐 어떤 사람들은 지금 머신러닝 블록체인 같은 개념을 이야기 해야 하는 시점에 어떻게 올드한 심리학이니 무의식의 세계니 하는 얘기를 하느냐고 의아해 할 수 있을거다. 하지만 필자는 진심이다 결국 건강한 자아가 있고서야 기술도 있고 미래도 있다.


지금의 시대는 전문가도 많고 길도 많다. 선택의 여지가 많고도 많다. 예전 처럼 국정교과서로 공부하면서 교과서에 충실하기만 하면 학력고사에서 나름 좋은 점수를 얻고 그것으로 원하는 대학 학과를 지원하던 시대는 한창 지났다 ( 헌데 필자는 그 시대의 장점을 다시금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


이제는 산골에서 할머니가 혼자 손주를 키우고 손주는 혼자서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어 할머니에게 효도를 다하는 ... 그런 낭만을 생각하기 어려운 시대다. 자녀를 키우는 일에는 수 많은 선택이 존재하고 있다. 어느 학원에 보내고, 어느 학교에 지원하고, 어떻게 내신을 준비하고, 어떻게 입학사정관제도를 잘 활용하는지에 따라 실력이상의 수준의 대학을 가기도 하고 대학에 가지 못하기도 한다. 해서 엄마들의 정보력이 자녀의 교육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해서 농담반 진담으로 자녀의 대입은 엄마의 정보력, 조부모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이 세가지가 필수 조건이라는 농담이 시중에 나돌았기도 했다. 헌데 이러한 새로운 풍속이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지금 현재 40대의 부모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취업난이다.


문과를 지망해서는 연대를 나와도 취업이 쉽지않다... 이게 작금의 현실이다. 연대 뿐 아니라 어느 명문대를 나와도 어렵다. 심지어 외국에서 유명 대학을 졸업해도 한국의 직장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권력에 조금이라도 줄이 닿는 사람들은 길을 쓰고 줄과 연을 잡으려고 애쓴다. 그런것들이 없는 젊은이들은 절망한다. 정말 초중고 10년 이상을 말도 못할 인내를 다해서 대학에 들어왔는데... 적어도 그렇게 참고 참으면 좋은 일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환상이 깨진다.


학부모들도 당황한다. 대학만 보내면 이제 알아서 탄탄대로를 가리라 생각했는데 뭐 하나 만만한게 없다. 대학 1학년때부터 취업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연애나 결혼 같은 것은 사치재에 속해 버린지 오래다. 아예 젊은이들은 그것들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연애도 취업도 미래도 포기한채 현재를 즐기는 것에서 그들은 답을 찾는다. 이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필자는 생각했다.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러한 현실이 닥친 것인지... 정말 그 원인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필자의 식견으로는 이것들의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건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라고


필자가 소시적에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시절 용돈벌이를 했는데 그 때에 필자의 생각은 이랬다 "모르는 것 알면 되고, 알게 된것 안 까먹으면 된다. 이러면 대학은 간다" ... 사실 그렇게 되는게 정상이다. 초중고 시절 하나씩 자신들의 실력과 지식을 쌓이기만 하면 그것으로 평가받아 대학을 가고... 그 시절에는 그렇게 대학을 갔다. 그래서 필자도 서강대학교에 입학했었고 말이다.


헌데 지금 그런 식으로는 택도 없다. 그 때와는 상상하기 어려운 경쟁이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필자의 고3 시절을 생각해 보면 50명 정도 되는 학급에서 서울대만 7명을 갔다. 연대합격자가 4명 ... 필자는 학교 레벨로만 따지면 반에서 10등 안에도 들지 못하는 아주 수수한 학생이었다 ( 물론 8학군 학교를 다녔기에 그랬을른지도 모르겠다 ㅎ )


헌데 지금은? 전교에서 3-4명 서울대를 가면 대단한 학교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비해서 애들이 멍청해졌냐? 천만에 필자는 최근 아이들의 초등학교 산수책을 보고 기겁을 했다. 너무 어려워서 초등학교 산수를 못 풀 정도였다. 거기에 영어는 또 얼마나 잘하나. 필자는 영어를 중학교 들어가면서 처음 배웠다.


헌데 이렇게 배우고 배운 애들이 고등학교를 가면 반에서 날고 기어야 인서울 대학을 노려본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도데체 뭐가 잘못되었길래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건지 궁금했지만 쉽게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결론은 변별력이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경제가 과거에 비해 성장하고 부모가 교육에 대해 관심이 많을수록 공부에 손 놓는 아이들이 줄어든다. 그러면 당연히 경쟁이 치열해진다. 그 경쟁이 치열할 수록 실력이 있는 학생과 실력이 떨어지는 학생을 구분할 수 있는 정확한 기준이 요구된다.


우리애가 옆집애보다 왜 등수가 3등이 떨어지는지 납득할 만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이 "우리애는 옆집 애보다 공부를 못해" 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부모는 흔치 않다. 그래서 변별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변별력은 상위 등수에서 더 치열하게 요구되게 된다. ( 1등에서 5등 사이의 아이들이 더 등수에 예민한 건 어쩌면 당연하다.  27등이나 30등이냐는 큰 차이가 없지만 1등이냐 3등이냐는 큰 차이가 나는게 사실이니깐 )


해서 변별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여기에 수시 중심의 입시가 기름을 부었다. 내신이 대입을 가르는 결정적인 지표가 되면서 아이들은 시험에 목숨을 건다. 당연히 점수와 평가에 예민해 질 수 밖에 없다.


상위권 진입을 노리는 아이들은 많아지고 하위권으로 내려가고 싶어하는 아이들은 없다. 그러면 상위점수의 변별력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시험문제는 엄청나게 어렵게 나와야 한다." 많이 틀릴 수 밖에 없는 문제가 나와야 변별력이 명확해 지니까 ( 다 백점 가까이 나오는 시험은 변별력이 떨어진다 )


여기까지는 거의 대부분의 학부형들이 아는 내용들이다. 헌데 여기에서 부터 필자의 고민은 시작된다. 그렇게 변별력이 강조되고 강조될 수록 교육은 죽어버릴 수 밖에 없다. 해서 필자는 변별력 있는 교육을 혐오한다.


무슨얘기냐 하면 ... 일반적으로 교육에는 시간이라는 자원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하나를 배우고 익혔으면 그것이 자신의 사고와 인격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또한 여유가 필요하다. 과거의 경우에는 획일적인 교육이기는 했어도 적어도 시간과 여유라는 면에 있어서는 지금의 교육보다 훨씬 풍요로왔다고 본다.


헌데 변별력이 강조되면서 문제가 어려워진다. 당연히 공부해야 할 내용이 어려워진다. 어려운 문제를 풀기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헌데 이게 중고등학교에서는 구지 필요하지 않는 부분들까지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러 버렸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식을 음미하고 응용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 여유가 입시중심의 교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이라는 것은 익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계가 필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기존의 배운 내용을 다시 습득하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의 교실에는 그런 여유따윈 없다. 차근차근히 기초부터 튼튼히 하면서 자신의 실수까지도 끌어안고서 실력으로 만들어 갈 여유가 지금의 교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교육은 결국 차근차근히 밟아가는게 아니라 과정 다 건너뛰고 어려운 문제를 달달 외워 푸는 식의 요령이 판치는 형태가 되기 마련인거다. 왜냐고? 일단 닥친 문제를 풀어야 대학에 가게 생겼으니까 말이지


예를 들어서 ... 영국의 명문대생들이 우리나라 수능문제를 못 풀어서 쩔쩔 매는 일이 벌어진다.  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이 "도데체 이런 영어문제를 왜 풀라고 하는건지 이해가 안간다" 라는 이야기를 한다. 자연과학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수능레벨의 평이한 물리 문제를 풀지 못해서 쩔쩔맨다... 이게 절대로 좋은게 아니다.


혹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른지도 모른다. 어려운 문제를 푼다는 것은 그만큼 아이들이 똑똑해지고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냐고.. 천만에 절대로 그건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문제는 "요령이 없으면 절대로 풀지 못할 문제들이다" 그리고 "그 요령은 절대 학교 선생님들이 가르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학원에 가지 않으면 요령을 배울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 ... "요령은 요령일 뿐이다. 그것은 절대로 실력과는 다른 개념이다. 실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요령만 늘면 인간은 망가지게 되어있다. 그러다가 그 요령이 통하지 않는 문제에 마주치게 되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은 일거에 무너지게 된다" ... 사실 사회생활에 접어든 엘리트 모범생들에게서 이런 현상은 쉽게 보여지고 있다. 필자도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고 밟아온 젊은이들을 많이 만난 편인데 그들의 사회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결국 교육이라는 부분이 총체적으로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경쟁이 심화되는 것으로 변별력이 강조되고 거기서 부터 모든 교육이 근본부터 무너지고 있는데 .... 문제는 이것을 개혁하려면 대입부터 손봐야 한다. 헌데 대입은 어떻게 바꾸어도 욕을 먹게 되어 있고 정권의 존망과도 연관되는 문제가 되기에 어느 정부도 쉽게 손을 대지 못한다.


그리고 사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느 교육주체도 대입이 전면적으로 바뀌어 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학원비로 돈 수억과 시간을 들인 학생과 학부모들은 다시 과거와 같이 기본기에 충실하고 교과서만으로 풀 수 있는 학력고사 수준의 대입으로 돌아가는 걸 원치 않는다. 그리고 학원들도 그러하다. 학원들 입장에서는 대입이 바뀐다는 것은 학원의 존폐와 관련된 일이 된다.


그리고 교사들도 은근히 지금의 제도가 존속되기를 원한다. 사실 지금의 교사들 중에는 실력 없는 교사와 실력 있는 교사가 별 차이가 없다. 왜냐구? 어려운 문제는 못푸는 건 똑 같으니깐.... 그리고 학생들이 바라는 수준의 교육을 못해주는 건 같으니깐... 나름 세월을 보내면서 연금나올 시점을 기대하고 살아간다는 얘기는 여기저기서 필자는 많이 듣기도 하고 보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이야 말로 주류에서 떠난 비주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전 글에서 필자는 후배가 이야기한 "보수적인 물고기 70% 그리고 진보적인 물고기 30%" 이야기를 했다. 모두가 진보적일 수도 없고 모두가 보수적일 수도 없다. 하지만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여 기존의 방법으로는 모두가 몰살하게 될 것 같은 상황에서 진보적인 물고기는 살아남아 종을 이어간다는 얘기는 정말로 필자의 가슴에 꽃혔다. 그 얘기는 진리에 가깝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주류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그 주류를 떠난 생각과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버릴 수 있는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라고 생각한다.


자아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게 안된다. 버릴 것은 버리지 못한다. 계속해서 자신의 아픈 마음을 움켜쥐고는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게된다.


어느 심리학자의 얘기다. 우리네의 심리를 따져보면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로 나뉜다고 한다. 그리고 의외로 무의식의 세계는 부피가 크다. 빙산의 대부분이 물 아래에 존재하는 것 같은 ... 거의 90% 넘는 부피를 차지한다. 헌데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그 무의식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근거한다고 한다. 결국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한다 하더라도 사람은 "자신이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일을 피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행동한다" 라는 것이다.


해서 성경에 보면 자신의 마음을 이기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 보다 위대하다는 귀절이 있다. 아마도 이러한 인간의 내면을 꿰뚫은 현자에 의해서 쓰여진 귀절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주장하는 교육은 결국 비주류의 교육이다. 주류가 향하는 길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기에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보려는 시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법들을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연애도 그러하지만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자신이 왜 이것에 집착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생각하고 극복해 내지 않는다면 사람은 영원히 주류의 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 극심한 공포를 느끼며 살아갈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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