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손 세정제였다. 어차피 미국에서는 마스크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마스크는 ‘아픈 사람이 사용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때문에 마스크를 파는 곳도 드물다. 마스크가 아니라면 무엇이 전염병에 대비하는 물건일까. 손 세정제와 99.9% 살균 티슈였다.
마트에서 손 세정제는 일찌감치 동이 났다. “내일 들어올 것”이라던 홀푸드 마켓 점원은 다음날 “창고에도 없다고 한다. 언제 들어올지는 우리도 모른다”라고 답했다. CVS는 1인당 1개씩 휴대용 손세정제를 팔았다. 1주일 전 아울렛 바디숍에 넉넉하게 있던 5개 7달러짜리 휴대용 세정제도 이미 바닥이 나 있었다. 어제 잠깐 들른 푸드 라이온에서 예상치 않게 계산대 앞에 세정제가 있어 냉큼 잡아든 것(1인당 2통 한정)이 행운이라면 행운이랄까.
한국에서도 한반도 정세가 위태로울 때 물과 라면, 가스버너, 휴대용 라디오 등을 사뒀던 1인으로써 코로나19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대비 안 할 리 없다. 20kg 쌀을 사고, 물을 여러 통 사놨으며 참치나 스프 등 캔 종류의 비상식량을 부엌 서랍장에 채워놨다. 라면은 아이들이 먹지 않아 사지 않았다. 대신 큰 사이즈 카레 가루와 김 등을 샀다. 미국인들은 라면 대신 파스타 면과 소스를 사는 것 같았다.
처음엔 화장지를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 달 정도는 쓸 여유분이 넉넉하게 있었다. 그런데 어랏. 사람들이 죄다 화장지만 산다. 카트 가득 화장지와 키친타월을 담는다. 진열대는 빠르게 비어갔다. 진짜 뭐지 싶었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화장지와 키친타월을 카트에 담고 있었다. 군중심리란 것이 이래서 무섭다. 다른 사람이 하면 나도 꼭 해야만 할 것 같다. 어차피 화장지는 유통기한이 없다. 썩지도 않는다. 쌓아두고 그냥 쓰면 되는 것이다.
나중에 둘러보니 주방세제도 세탁세제 진열대도 텅텅 비어 간다. 주방세제나 세탁세제 또한 유통기한이 없다. 언젠가는 쓰게 된다. 화장지와 비슷하다. 트럼프 정부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기 전부터 생활용품 비축하기는 사재기로 이어졌다. 정부는 ‘2주간의 비축품’을 얘기했으나 사람들은 그 이상을 쓸어 담고 집으로 가져갔다. 다행히 빈 선반은 다음날 아침이면 채워진다. 물론 이 또한 몇 시간 뒤면 텅 비게 되지만.
물이나 식료품은 이해를 한다. 그런데 화장지는 왜?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쳐주는 70대 조안 할머니는 "진짜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다"라고 했다. 미국 언론도 의아한 듯하다. <CNN>, <타임>, <뉴욕 타임스> 등이 ‘화장지 사재기는 왜’라는 류의 기사를 냈다. 그중 <타임>과 인터뷰 한 조지 워싱턴대 의과대학 정신의학 행동과학과의 심리학자 메리 알버드 박사의 인터뷰를 보고 웃었다. “화장지가 (집 안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위안이 된다. 우리 모두 먹고, 자고 똥도 싼다.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게 기본이니까.” 거기에 덧붙인다. “우리는 더 이상 나뭇잎을 사용하지 않으니까.” 하긴 요즘은 신문 구독도 안 하니 화장지를 대신할 무엇이 없긴 하지.
카네기 멜론 대학의 교수인 심리학자 바루치 피쇼프 박사의 말이 더 신뢰가 간다. “최근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코로나19가 큰 문제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갑자기 (국가로부터) 불확정 기간 동안 생필품을 비축하라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은 원하는 음식을 찾지 못하면 다른 음식을 살 수 있다. 하지만 화장지는 대체품이 없다. 대안이 없는 제품을 비축할 필요성은 언제 사태가 끝날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악화된다.” 하긴, 여긴 비데도 없지.
미국 정부에 대한 신뢰도 추락도 사재기를 유발시킨다. 트럼프 정부는 코로나19 초기부터 느긋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 때마다 코로나19가 아닌 경제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당시 다우존스 주가가 폭락하던 시기였다. 코로나19로 인해 드리워진 세계경제의 암운으로 주가가 폭락하고 있는데도 그는 미국 경제만 걱정했다. 사태 전후의 맥락조차 잡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코로나19 사태를 해결해야만 경제 문제가 해결될 텐데 말이다.
사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은 현재 코로나19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잘 대응하고 있다”라고 말하던 때 각 주 정부의 비상사태 선언은 계속 이어졌으며 NHL, NBA, MLS 등 스포츠 리그 중단 발표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셜 등 유명 놀이공원들이 한시적으로 문을 닫겠다고 발표했다.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의 이런 엇박자가 미국 내 사람들의 심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트럼프 정부의 위기 대처 능력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CDC(질병관리센터) 방문에서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천부적으로 잘 안다”라는 식으로 말해 주위 사람들을 기함하게 만들기도 했다. 미국 인기 TV 프로그램인 <Saturday Night Live>(SNL)에선 이 화면을 보여주면서 “오 마이 갓, 우리는 모두 죽을 거야”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만약 치료제도, 백신도 아직 없는 코로나19가 정부에 의해 적절하게 통제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공장이 멈추거나 운송 트럭이 운행하지 않으면 물품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질까. 가뜩이나 화장지 같은 경우는 공장에서 재고를 넉넉하게 쌓아두지 않는다. 싼 가격에 비해 부피가 큰 제품이기 때문이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교수이자 임상 심리학자인 테일러 박사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혀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다. 사람들이 이 바이러스가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심각하게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반된 메시지를 들으면 극단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테일러 박사는 나처럼 텅텅 빈 선반이 사람들의 구매 욕구를 더 부추긴다고도 했다. “누군가 가게에서 공황상태로 구매하는 것을 보면 공포 전염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빈 선반 사진들은 사람들이 할 수 있을 때 서둘러 화장지를 사야 한다고 믿게 만들 수도 있다.” 언론 매체를 통해 보이는 이미지들이 대중의 공포를 가중시키면서 여타 다른 사람들을 사재기 행렬에 동참시킨다는 해석이다. SNS 시대에 이미지 충격은 더 강하니까.멀리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스포츠 리그가 중단되고 학교가 급작스럽게 휴교 결정을 하고, 놀이공원, 커뮤니티 센터 등이 모두 문을 닫은 낯선 상황. 게다가 대도시는 사정이 다르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차로 10분 이상 가야만 식료품이나 생활필수품을 살 수 있다. 한국처럼 집 앞에 편의점이나 소형 마트가 있지 않다.
만약 전염병이 통제 불능의 상황에 닥치면 어떻게 될까. 가뜩이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총기 허용 국가여서 통제 밖 상황이 되면 상상 이상의 무질서가 범람한다. 만약 전기가 끊기면? 만약 수도가 나오지 않는다면? 만약...만약...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려면 최소 2주 간의 식료품과 물, 그리고 생활 비품들이 필요하다. 2주 동안 혼돈, 혼란이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하필 대통령이 위기관리 능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역대 최악의 사령관으로 불리는 도널드 트럼프다. 이런 불안 심리가 물, 캔 식품을 넘어 화장지, 세제 등등을 사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집안 한구석에 쌓인 쌀과 물, 그리고 냉장고 가득한 식료품을 보면 그나마 안심이 되니까. 겪어보지 못한 재난에 맞설 최소한의 대비가 된 듯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