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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Mar 21. 2020

19살 성희, 그리고 22살 태진

제주 4.3사건, 그 후의 이야기

 할머니 이름은 ‘성희’. 1930년 태어나신 분 치고는 이름이 꽤 현대식이다. <토지>의 주인공 ‘서희’라는 이름도 생각나고. 그렇다. 할머니는 하인들까지 여럿 있던, 당시 떵떵거리던 장씨 집안의 막내딸이셨다. 곱디곱게 자란 그런 양반집 규수.  


 할머니의 첫번째 남편은 땅부자 김씨집 6남매 중 둘째 아들, ‘태진’이었다. 즉, 우리 할아버지셨다. 할아버지는 똑똑했고, 운동 능력도 좋았다. 마라톤도 잘했고, 야구도 잘했다. 게다가 멋쟁이셨다. 웨스턴 부츠에 꽃무늬 셔츠를 입고 다니며 손목시계까지 차고 다니던. 상고를 졸업해 군청에 다니던 공무원이기도 했다. 장씨 집안에서 탐낼 만한 사윗감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뒤 두 분은 떨어져 지냈다. 할아버지는 시내에서 혼자 살며 군청에 다녔다. 할머니는 시골 친가 근처에서 지냈다. 지금으로 치면 주말부부였다고나 할까. 할머니는 우리에게 종종 “남의 집 제사에서 만나 몰래 하룻밤을 보낸 뒤 너희들 아빠가 생겼다”라고 말씀하시고는 했다. 합방한 날짜를 꼽으면 3번뿐이라고 웃으셨다.  


 지근거리에 살던 양반집 막내딸과 부잣집 도련님의 결혼. 당시로 치면 최고의 조합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게 그리 호락호락할까. 그때 4.3 사건이 터졌다. 가뜩이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고 자란 곳이 제주도 중산간 지역이었다. “낮에는 읍내에서 경찰들이 올라와서 폭군 잡는다고, 밤에는 산에 있던 폭군들이 내려와 자신들에게 협조하라고 못살게 굴던”(할머니의 표현) 그런 마을이었다. “경찰도 무섭고, 폭군도 무섭던” 그런 마을.


 겨울 어떤 날은 동굴로 마을 사람들이 전부 피신을 간 적도 있었다. 첫 아이를 가진 할머니도, 다섯 번째 아이를 가진 외할머니도 산부의 몸으로 부랴부랴 동굴로 도망을 쳤더랬다. 그때 경찰의 꼬임에 넘어간 한 할아버지의 밀고로 경찰들은 동굴 입구에 불을 지폈다. 다행히 사람들은 매캐한 연기를 뚫고 다른 쪽 출구를 찾아 도망칠 수 있었다. 평소 아주 순했다던, 그 밀고한 할아버지는... 동굴 앞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


 할아버지는 이때 마을 밖, 제주 시내에 있었다. 공무원이었으니까. 산사람들(할머니 표현으로는 ‘폭군’)은 할아버지 가족들을 협박했다. 시내에 있는 아들을 마을로 데려오라고. 공무원만큼 좋은 인질도 없을 테니. 할아버지는 “네가 안 돌아오면 산사람들이 우리 아홉 식구 다 죽이겠단다”라며 울면서 찾아온 어머니, 즉 증조할머니를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라며 돌려보내고는 했다. 하지만 핏줄을 어찌 외면할까.


 할아버지는 임신 중인 아내와 가족 걱정 탓에 밤에 몰래 자전거를 타고 마을로 찾아왔다. ‘얼굴만 보자’ 싶었는데 그 와중에 밀고자가 있었나 보다. 할아버지는 그대로 마을에 붙잡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948년 12월. 군경이 트럭을 몰고 마을에 들이닥쳤다. “트럭에 타고 같이 가면 그동안 폭군에게 동조했어도 모두 용서해줄 것”이라고 했다. 동조라고 해봐야 고작 음식 등을 나눠줬던 것 뿐일 텐데... 할아버지는 말없이 트럭에 올라탔다. 첫째 형도 함께였다. 셋째는 트럭에 올라타려고 했는데 체구가 작아 자꾸 미끄러지면서 타지 못했다. 트럭은 그대로 출발했다. 임신 7개월의 19살 할머니는 22살의 할아버지에게 작별의 손짓을 했다. 금방 다시 만날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하지만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형도 다시는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체구가 작아 트럭에 올라타지 못했던 셋째 할아버지는 3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흔 살을 넘기셨다.)


 소문만 무성했던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꽁꽁 얼어있던 땅에 봄기운이 스밀 무렵, 군경은 ‘그곳’의 위치를 가르쳐줬다. 마을 사내들이 차가운 죽창에 맞고 쓰러진 뒤 불태워진 그 구덩이. 불탄 시체는 서로 엉킨 채 썩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할아버지 시신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꽃무늬 셔츠에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할아버지 형의 시체는 끝내 찾지 못했다.

 그 뒤, 할머니는 아버지를 낳았다. “아빠”라고 부를 사람이 처음부터 없던 유복자의 운명으로. 김씨 집 사람들 몇몇은 할머니에게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며 욕지거리를 했다. 할머니는 그 박복하다는 ‘9월 말띠 생’이었다.


 할머니는 몇 년 뒤 ‘고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을 했다.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긴 할머니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씨’ 할아버지는 6.25 참전 군인으로 팔에 총을 맞고 제대한 상이군인이셨다. 팔이 욱신욱신 쑤실 때마다 고씨 할아버지는 술을 마셨다. 전쟁의 상흔을 달래기에 술만한 것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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