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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Mar 31. 2020

타인의 온기가 두려워지다

코로나19 시대의 도래

눈을 떴다. 순간 생각한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요일 감각이 사라졌다. 아이들도, 나도 그저 아침-점심-저녁만 있는 듯하다.


내가 살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NC) 채플힐은 3월16일부터 휴교에 들어갔다. 원래는 4월6일 학교가 다시 문을 열 예정이었으나 5월 중순으로 다시 미뤄졌다. 상황이 변할 경우 이 결정은 달라질 수 있다는데 누구도 앞으로의 일을 가늠할 수 없다. 노스캐롤라이나의 경우 2월28일에 첫 확진자가 나왔고 보름도 안돼 휴교가 결정됐다. 주 비상상태는 3월10일에 선포됐다. 코로나19는 그만큼 급속도로 퍼졌다.

노스캐롤라이나 확진자 추이. 2주 사이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아이가 1주일에 두 번 받았던 영어 과외도 중단됐다. 첫째가 학교생활을 힘들어해서 시작했던 것인데 학교도, 과외도 멈췄다. 아이는 의도치 않게 영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됐다. 나 또한 UNC 대학생 봉사 프로그램의 하나로 제임스라는 학생과 무료로 1대 1 대면 영어회화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 또한 중단이 됐다. 봄 방학 전에 “집에 잘 다녀오라”며 건넨 인사가 마지막이 됐다. 아이들이 커뮤니티센터에서 들었던 테니스 수업도 취소됐다. 여름까지 이어지는 딸의 소프트볼은 4월3일 환불결정이 났다.


오렌지카운티는 3월27일 저녁 6시를 기점으로 ‘STAY AT HOME’ 상황에 들어갔다. 4월 30일까지 집 주변에만 있으라고 한다. 되도록 외출은 자제하고 마트 장보기도 1주일에 한 번 정도만 하란다. 지인 방문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지 말아야 하고 아픈 경우를 제외하면 병원 관계자 등과 접촉도 금지됐다. 여행 자제 권고 또한 떨어졌다.


 그나마 가족들과 산책, 공원 방문 등은 가능하다. 하지만 공원 내 화장실이 전부 폐쇄돼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 수는 없다. 놀이터 또한 폐쇄됐다. 원래대로면 부활절 맞이 행사가 한창일 텐데 모든 게 멈췄다. 가족들 각각이 하나의 섬이 된 듯하다. 딸은 부활절 달걀 찾기 행사(공원에 달걀을 숨겨놓고 찾는 행사)가 취소된 데 짙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공용 주차장은 무료가 됐다.

닌텐도 스위스 칩을 사기 위해 오전에 갔던 다운타운 내 타깃 마트. 다운타운 내 레스토랑은 거의 문을 닫았고 스타벅스마저 영업이 중지된 상태다. 타깃 마트에 들어서자 장을 보는 몇몇 사람들(대학가니까 대부분 대학생)이 눈에 띄었다. 점원들은 최대한 거리두기를 했다. 내가 다가가자 멀찍이 비켜섰다. 코로라19가 고약한 게 보균자가 누군지 도통 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무조건 지인이든 낯선 사람이든 피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마트나 레스토랑에서 고객이 왕이 되기는커녕 잠재적 보균자일 수도 있어 피해야만 하는 존재가 됐다.

대기인들의 거리 두기를 표시해둔 약국.

사람들은 마트에서 대부분 셀프 체크 서비스를 이용했다. 되도록 대면 접촉을 줄이기 위해서다. 닌텐도 스위치 칩은 셀프 체크인이 안되기 때문에 계산대를 이용했다. 그런데 여기 점원 어느 누구도 마스크를 안 했다. 장갑도 안 꼈다. 미국은 의료계 종사자나 아픈 사람이 마스크를 쓰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때문에 나 또한 마스크 쓰기가 조심스럽다. 타인에게 ‘나=아픈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줄 것 같아서다. 하지만 무증상자가 많은 코로나19 특성상 마스크 착용만이 확산을 막는 유일한 방법일 듯한데... 문화가 쉽게 변할 리 없다.


 마트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특이한 점도 발견했다. 사람들이 1회용 봉투를 사용하지 않는다. 장바구니를 일부러 사는 사람도 있다. 혹시나 계산대 옆 1회용 봉투에 묻었을 바이러스를 염려해서다. 한 번 들고 갔던 파란 면 마스크를 써봤다. 주위 사람들이 슬금슬금 나를 피한다. ‘마스크=아픈 사람’의 고정관념은 무섭다.

여전히 마트에는 화장지 품절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젊은 남자 둘은 마트 문을 열 때 문고리를 잡지 않았다. 발을 이용해 열었다. 평소 같으면 눈살 찌푸릴 행동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람, 사물과 접촉을 최대한 줄여야만 한다. 젊은 커플이 있었는데 이들 중 여성은 머플러로 코와 입을 막고 있었다. 손에는 라텍스 장갑.  횡단보도를 건널 때 보통은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지금은 버튼을 가려버렸다. 버튼을 통한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STAY AT HOME’ 명령이 떨어지면서 아이들은 옆집 친구들과도 더 이상 놀지 못하게 됐다. 가족들과만 지내라니까 어쩔 수가 없다. 둘째의 생일파티를 지난주에 끝낸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긴다. 물론 이때도 옆집 친구만 초대했었지만. 원래대로라면 미국 친구 여럿을 볼링장에 초대해 놀 계획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식 생일파티를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 물거품이 됐다. 휴교 전날에 백인 친구, 헤이즐이 집에 놀러 왔던 게 마지막이 됐다. 7월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아이가 그 친구와 다시 연날리기를 하며 놀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코로나19의 가장 아픈 단면은 인간관계의 단절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그럴싸한 표현을 쓰지만 ‘자발적 외톨이 되기’ 미션 같다. 다른 사람을 의심하게 되면서 ‘오직 너만 믿어라’라는 삶을 강요받고 있는 듯하다.   

둘째 담임선생님이 온라인으로 책을 읽어주는데 고양이(이름이 스쿼시)가 난입했다.

 온라인 수업이라고 하지만 실상 선생님이 커리큘럼을 올려주면 혼자 공부하는 식이다. 상호작용은 그냥 온라인 체크밖에 없다. 화상 통화로 상담할 수 있다는데 영어가 짧은 아이들에게는 두터운 벽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가끔 전화를 주는 담임 선생님 목소리가 어찌나 반가운지. 4월13일부터 본격적인 온라인수업이 시작되는데 그때는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다. 학교는 실시간 온라인 수업을 위해 학생들에게 PC 소유 여부를 일일이 조사했고 없는 이들을 위해 기기를 대여해줬다.

횡단보도 앞에 있던 길 건너기 버튼이 가려졌다. 버튼을 누를 때 감염될 가능성을 미리 차단했다.

 포장 주문은 기계적이 됐다. 며칠 전 먹은 도미노피자가 그랬다.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해당 매장 앞 주차장에서 깜빡이를 켜고 있으면 점원이 피자를 갖고 와서 차 트렁크 위에 올려놓고 간다. 매장 로비가 폐쇄됐기 때문이다. 주문자와 점원 내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이드미러를 통한 가벼운 미소 주고받기뿐. 약국 같은 경우에는 계산대 2m 앞에 줄이 그어져 있다. 대기 의자에는 의자 하나 건너씩 ‘사용하지 말 것’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다운타운에서 봤던 아저씨 두 명은 2m 간격을 두고 서서 얘기를 나눴다. 미지의 전염병은 인간을 멀어지게 만든다. 그게 물리적 거리든, 심리적 거리든.   


관리사무소(리싱 오피스) 접근 또한 차단됐다. 아파트 내 체육관도 출입금지. 매달 초마다 월세를 내러 들렀는데 이젠 온라인으로만 받겠단다. 리싱 오피스 사람들을 만나기도 이제 어려워졌다. 일상이 무너진 것은 둘째치고 사람이 무서워진 시대가 됐다.  


 아이들의 볼에 뽀뽀하기가 겁이 난다. 혹시나 내가 외출했던 동안 바이러스를 품고 오지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나 또한 내가 보균자라는 것을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불안함을 증폭시킨다. 가뜩이나 나는 환절기 비염환자라서 지금이 딱 목이 아프고 콧물이 날 때라서 더욱 긴장이 된다. 코로나19의 가장 무서운 점이 ‘바이러스가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있다’는 점 아닐까. 치명적이지 않지만 치명적인 바이러스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난 듯하다. 공원 벤치에조차 앉기가 꺼려졌으니까.


 코로나19가 끝나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디지털 시대에 대인 스킨십에 목마른 면도 있었는데 오히려 이를 계기로 더욱 비대면 접촉 사회가 되어가는 게 아닐까. 앞으로 마트나 음식점에서는 셀프 계산대가 더욱 늘어날 것 같고.  학교 또한 기계를 이용한 온라인수업이 활성화될 듯하고.


 다른 사람의 온도로 내 온도도 따뜻해질 텐데...다만 앞으로는 내 안의 온기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슬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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