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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May 06. 2020

새벽 1시, 야구가 시작됐다

KBO ON ESPN: 한국 야구가 미국에 생중계된 날

꾸벅. 졸았다. 막 자정을 넘긴 시간. 하지만 참아야 한다. 새벽 1시를 기다려야만 한다. KBO리그가 야구 종주국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는 첫날이다. 2020 KBO리그 개막전이 전 세계 스포츠에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날이기도 했다. 역병의 시대에도 스포츠는 죽지 않는다고, 다시 온몸에 뜨거운 피가 돌면서 팔딱팔딱 심장이 뛴다고. KBO리그 개막전은 그런 상징성을 띄고 있다. 코로나19로 전 세계 프로 스포츠를 비롯해 아마추어 스포츠도 전부 ‘잠깐 멈춤’ 상태이기에 더욱 그렇다.  


미국 동부시각으로 새벽 1시에 개막전이 시작되는 터라 시청층이 과연 있을까 싶지만 사실 아주 많을 것도 같다. 특수 상황이기 때문이다. 내가 살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NC) 등 미국 주요 도시는 지금 쿼런틴(자택 격리) 상황이다. '집 밖은 위험하다'는 생각으로 주변인과의 접촉을 최소화하며 주로 집안에서만 머문다. 회사 방침 상 재택근무자도 꽤 된다. 10명 이상 모이는 것도 금지시키는 주가 많다. 집에서만 머물게 되니 낮과 밤의 경계까지 모호해진다. 그래서 시청률을 걱정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전 세계적으로 라이브 스포츠가 전멸하면서 ESPN을 비롯한 모든 스포츠 채널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주야장천 옛 경기만 틀어대는 상황이라서 더욱 그렇다.

KBO리그 5경기 중 1경기를 생중계하는 ESPN의 개막전 선택은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라팍)에서 열리는 삼성 라이온즈와 NC 다이노스의 경기. 아마도 삼성이 미국 팬들에게는 익숙한 기업이기 때문에 선택한 듯도 싶다. 해외 중계권을 판 에이클라가 SPOTV를 운영하니 실시간 영상 송출 등의 편의를 위해 SPOTV 중계 경기를 택한 듯도 하고. 이번 주 ESPN 중계 예정 경기가 모두 SPOTV 중계 경기인 것을 보니 맞는 듯하다. 삼성을 비롯한 LG, KIA 등 미국 현지에서도 익숙한 팀의 경기를 중계하는 것은 현지 광고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SPN의 KBO리그 생중계는 낯선 방식으로 이뤄졌다. 칼 라비치, 에두아르도 페레즈 등 ESPN 중계진들은 각자의 집에 머물면서 노트북으로 경기 영상을 보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이곳 시간이 새벽이기 때문이 아니다. 쿼런틴 명령 때문이다. 요즘 미국은 방송을 다 같이 모여서 하지 않는다. 집안 서재, 거실 등 각자의 공간에서 영상통화를 하면서 프로그램을 만들어간다. 토크쇼의 경우 호스트 혼자 스튜디오에 있고 출연자들을 화상으로 연결해 인터뷰한다. CNN 뉴스도 기자들이 대부분 집에서 브리핑한다. ESPN이 기존의 방식이 아닌, 즉 스튜디오에 다 같이 모여 같은 화면을 보면서 생중계하는 방식이 아닌 각자 독립된 공간에서 온라인 화상 화면으로 연결해 생중계를 한 이유다. 칼 라비치는 이런 이유로 중계 전 인터뷰에서 “옆에서 와이프가 자는데도 양키스타디움에 있는 것처럼 중계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생중계지만 집중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지구 반 바퀴나 떨어져 있는 있는 곳에서 낯선 팀, 낯선 선수들이 펼치는 경기를 온라인 화면으로 보면서 실시간 중계를 해야 한다니. 가뜩이나 새벽 시간에. 스튜디오라면 카메라 여러 대를 앞에 둔 채로 PD, FD, 작가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계를 하니 긴장할 만하지만 가족들이 다 잠든 시간에 혼자 거실, 서재에 앉아서 TV, 컴퓨터를 보면서 다른 해설자와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이어가야 하니 이런 고문도 없겠다 싶다. 극한직업이 따로 없다. 칼 라비치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졸음과 사투를 벌이는 게 분명했다.   

반가운 얼굴도 초청됐다. 물론 화상전화로. KBO리그 최초로 40-40 클럽에 가입했던 에릭 테임즈가 그다. NC 다이노스에서 뛰었던 터라 초대된 듯했다. 순간 두산 베어스가 경기하면 올 시즌 MLB로 돌아온 린드블럼이 온라인으로 초청되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SK 와이번스가 경기를 하면 메릴 켈리가 화면에 등장하면 좋겠다. 어차피 MLB 경기는 휴지기니까. 언제 개막할지도 모르고. 류현진, 김광현 등은 통역가를 함께해야 하니 이런 중계방식으로는 미국 시청자들에게 불편함을 줄 것 같다.  


ESPN은 KBO리그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자료를 제공했다. 아무래도 미국 야구팬들이 처음 접하는 리그이기 때문이리라. 해설진이 가장 기대한 것은 배트 플립, 즉 빠던이었다. 155km를 던지는 투수들이 흔하고 장타를 펑펑 쳐대는 슬러거가 많은 MLB에 익숙한 팬들이 투구 속도 150km 이하의 투수가 많고 컨택트 위주의 리그에 흥미를 가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배트 플립은 메이저리그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메이저리그에서 챔피언십 결정적 순간이나 끝내기 순간이 아닌 일반적 상황에서 홈런을 치고 과한 몸짓을 하면 다음 타석에서 위협구를 각오해야 한다. 타자의 성공(홈런)은 투수의 실패(피홈런)를 의미하기에 상대를 배려하라는 의미에서 배트 플립 금지는 암묵적 합의 사항으로 있다.


메이저리그와 달리 KBO리그에서는 배트 플립이 흔하다. 이승엽처럼 상대 투수에 대한 예의로 홈런을 친 뒤 과한 몸짓 없이 고개를 숙이고 1루로 뛰어가는 선수도 더러 있지만 배트 플립은 홈런을 자축하는 하나의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파울을 쳐도 홈런인 줄 알고 배트 플립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나성범이 홈런을 친 뒤 배트 플립을 하지 않자 ESPN 해설진은 잔뜩 실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박석민에 이어 모창민이 백투백 홈런을 날리면서 제대로 된 배트 플립을 보여주자 해설진은 신나 했다. ‘드디어 봤다’라는 식이었다. 모창민의 배트 플립 장면은 ESPN의 스포츠쇼라 할 수 있는 스포츠센터 등에서 계속 내보냈다. SNS 상에서는 벌써부터 집 안마당에서 방망이를 들고 배트 플립을 따라 하는 영상 등이 올라온다. 하긴 집안에서 틱톡 영상을 찍는 것도 이제 지겨울 만해졌다.


배트 플립에 이어 해설진이 기대하는 장면은 치어리딩과 응원 문화다. 경기 외적인 것에 관심이 많은 듯한데 한국에서 대만 야구를 실시간 중계하면 어떤 점에 초점을 맞출까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갈 만도 하다. 야구 경기 자체도 궁금하겠지만 관전 문화 등에도 호기심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빠르면 다음 주부터 관중이 입장한다니 한국식 응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가 된다.   

미국은 현재 여느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아마추어부터 프로까지 모든 스포츠가 중단돼 있다. 휴교를 했으니 학교 체육 또한 없다. 축구장, 농구장, 야구장 등이 전부 폐쇄되면서 바깥 단체 스포츠도 실종됐다. 축구장은 범죄 현장처럼 노란 줄이 쳐져 있고 농구 골대는 꽁꽁 묶여있다. 단체 스포츠는 죽었다... 는 표현이 적당하다. 산책이나 자전거 타기, 조깅 등 혼자 하는 스포츠만 허락되니까.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라는, 그러니까 올림픽, WBC 등에서 성과를 냈던 곳에서 야구가 시작됐다니까 팬들의 관심이 몰릴 수밖에. 최악의 경우 올 시즌에는 MLB가 열리지 않을 가능성조차 제기되는 상황에서 한국 야구 개막은 MLB의 향후 시즌 방향을 제시해 줄 수도 있다. 비단 MLB 뿐만 아니라 EPL 재개 등에도 힌트를 줄 수 있다. 그래서 코로나 시대에 KBO리그의 안정적 운영은 더욱 중요하다.


SNS 등을 보면 개막전을 지켜본 미국인들이 꽤 많은 듯하다. 벌써부터 응원팀을 정해놓은 이도 있고 첫 경기에 실망해 응원 팀을 갈아탄 이도 있다. 공통분모는 그들 모두 야구의 시작에 흥분했다는 것.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과거의 야구가 아니라 끝을 알 수 없는 현재의 야구에 열광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순간 승패를 가르는 진짜 야구가 시작됐으니까. 그 대상이 한국 야구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투수의 손끝을 떠난 공이 포수 미트에 박히는 소리, 타자의 방망이에 맞은 공이 내는 경쾌한 파열음, 1루수 글러브에 강하게 꽂힌 공이 비로소 움직임을 멈춘 소리. 이런 야구의 소리를 듣기 위해 얼마나 기다렸던가.


5일 오후 3시 ESPN에서 삼성-NC 경기를 재방송해주자 10살 딸이 신기한 듯 물었다. “왜 미국에서 한국 야구를 보여줘?” 나의 답은 이랬다. “한국은 코로나 19 방역을 잘해서 야구를 하게 됐으니까. 미국은 언제 시작할지 모르고.”


의료진의 노고에 멀리서 감사를 보낸다. 야구가, 스포츠 세계가 무한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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