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중 OB 베어스 팬이 있다. 창단 때부터 팬이었다. 그의 고향은 충청남도 공주. 두산 야구단은 창단 때 ‘3년 뒤 서울 입성’을 약속받고 프로야구 출범 뒤 3년간 대전에 임시 둥지를 틀었다. ‘불사조’ 박철순의 22연승 역투로 프로 원년 우승을 차지했고 이때의 강렬한 기억으로 대전 및 충청 지역 야구팬들 중에는 지인처럼 OB 팬이 꽤 많다. 무엇이든 첫사랑의 기억은 꽤 오래간다. 그것이 야구일지라도.
두산 그룹이 맨 처음 ‘두산’이 아닌 ‘OB’라는 명칭을 쓴 이유는 당시 그룹의 주력 사업체가 OB맥주였기 때문이다. OB맥주병 귀퉁이에는 작은 곰(베어)이 그려져 있었고 이는 야구단 명칭에 반영됐다. 1983년 프로 최초의 2군 연습장이 경기도 이천의 OB맥주 공장 인근에 만들어진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몇몇 OB 출신 지도자들은 지금도 “이천공장에서 갓 나온 맥주의 맛이 그립다”라고 말한다. IMF 여파로 1999년 OB맥주 지분이 전량 매각돼 곰과는 전혀 관련이 없게 됐지만 ‘베어스’는 여전히 우직한 길을 걷고 있다. 반달곰처럼.
1995년, 그리고 2016년
누군가는 OB의 원년 우승이 가장 감동적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1995시즌 우승은 아주 특별했다. 모래알 군단이 기적 같은 우승을 일궈냈기 때문이다. ‘미러클 두산’의 시작이었다.
1994년 9월4일, 박철순, 장호연, 김상진 등 OB 베어스 주축 선수 17명은 윤동균 감독의 강압적인 팀 운영에 반발에 숙소를 집단 이탈했다. 프로야구 초유의 집단 항명사건이었다.
잔여경기 몰수패까지 언급될 정도로 사태는 꽤 심각했다. 선수 징계, 윤동균 감독 사퇴, 김인식 감독 취임, 항명 주도 고참 선수 은퇴 합의 및 번복 등이 이어지던 3개월 동안 OB는 뒤숭숭했다. 이런 상황에서 맞은 1995시즌이었으니 오죽했을까. 전년도 순위는 꼴찌나 다름없는 7위. 김 감독이 시즌 직전 인터뷰에서 “포스트시즌 진출을 노린다”라고 했을 때 주위에서 헛웃음만 나왔던 이유다.
2016시즌은 1995시즌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다. 두산 베어스는 디펜딩 챔피언의 신분이었다. 2015년 주축 투수 3인방의 해외 원정 도박으로 팀 분위기가 가라앉은 정규리그 우승팀 삼성 라이온즈의 5년 연속 통합 우승을 저지했다. 두산의 과제는 명징했다. 2015년 우승이 그저 다른 팀의 불행을 디딤돌 삼은 ‘행운’이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포스트시즌 탈락’의 팀 징크스를 깨야 한다는 점이었다. 1982년, 1995년,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 다음 시즌에 베어스는 늘 가을야구 경쟁에서 탈락했다. 우승 후유증이 심각했다. 2016시즌도 ‘의문’으로 시작됐다. 타선의 핵심인 김현수가 메이저리그로 이적했다. 이래저래 도전의 시기였다.
김인식과 그의 제자, 김태형
1995년 두산은 단지 사령탑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전년도와는 전혀 다른 끈기의 팀이 됐다. 김인식 감독은 ‘믿음의 야구’로 선수들을 융합하며 김상호, 김형석 등의 노장과 정수근, 심정수, 이도형 등 신진 세력의 조화를 꾀했다. 선수의 능력치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자율야구 아래 OB의 팀 컬러는 수비형에서 공격형으로 탈바꿈했다. 투수 출신인 김 감독의 탁월한 투수 기용도 우승으로 가는 큰 발판이 됐다. 김인식 감독이 덕장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도 이때였다. 당시 두산의 주축 포수는 김태형. 공격 지표는 떨어졌지만 수비에서는 리그 최고를 다퉜다. ‘곰의 탈을 쓴 여우’(곰탈여)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타자와의 수 싸움에 그는 탁월했다.
2015년 두산 사령탑이 된 김태형 감독은 늘 “김인식 감독과 김경문 감독을 본받고 싶다”라고 말해왔다. 두 지도자 밑에서 선수와 코치 생활을 하면서 체득한 것이 많다. 하지만 그의 지도 스타일은 앞선 두 김 감독과는 결이 다르다. 야구장 안에서는 차가운 카리스마로 승부사다운 면모를 보인다. “모든 책임은 감독이 지는 것”이라는 지론 아래 직설적이고 때로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공격적이다. 하지만 경기 외적으로는 선수들과 노래방에 같이 가거나 골프를 같이 치는 등 격 없이 어울린다. 그라운드 안에서는 차갑고, 그라운드 밖에서는 뜨겁다. ‘곰탈여’는 여전하다.
김태형 감독의 OB 선수 시절 모습. 두산 베어스 제공.
마르지 않는 화수분 야구
한 시즌 동안 감독의 역량으로 일궈낼 수 있는 승리는 10승 안팎. 나머지는 선수들이 해내야 한다. 1995년 김인식 감독의 자율야구 기치 아래 OB는 8개 구단 중 가장 넓은 잠실야구장을 홈으로 쓰는데도 유일하게 세 자릿수 홈런을 때려냈다. 김상호가 서울 구단 최초의 홈런왕(25개)과 더불어 타점 1위(101개)에 오르며 정규리그 최우수선수가 됐고 심정수, 이도형 등 2년 차 선수들이 힘을 보탰다. 연습생 출신 김민호는 47도루를 기록했다. 이들과 더불어 신인 정수근의 활약이 자극제가 되면서 베테랑들이 분발했다. 김태형 감독은 “당시 선수들 관계가 정말 끈끈했다. 선배들이 앞에서 끌고 후배들이 잘 따라왔다”라고 돌아본다.
2005년 두산은 1군 경기장 못지않은 시설을 갖춘 2군 경기장을 새롭게 선보였다. 이는 마르지 않는 화수분 야구의 젖줄이 됐다. ‘갑툭튀’가 아닌 준비된 ‘프로 선수’가 언제든 1군에 오를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됐다. 김현수의 공백은 백업 선수였던 박건우가 메웠고 김재환, 오재일 등 ‘유망주’에 머물렀던 선수들이 주축 선수로 발돋움했다. 일명 ‘판타스틱 4’로 불린 선발진(더스틴 니퍼트-마이클 보우덴-장원준-유희관)이 한 시즌 최초로 15승 이상씩 거뒀다. 완벽한 투타의 조화 속에 두산은 역대 최다승(93승)의 기록을 세웠다. 두산은 2015시즌부터 지난해까지 5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조직의 힘, 구단 사람들
잠실야구장 1루측 두산 사무실 안 사람들은 10년 전, 20년 전과 같다. OB에서 두산으로 이름을 바꾸는 과정 속에서도 그 안의 사람들은 거의 그대로 있다. 때문에 언제 어느 때 방문해도 이질적인 느낌이 전혀 없다. 야구 산업의 성장과 함께 한 사람들이 그곳에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베어스의 진짜 힘은 오롯이 ‘사람’과 ‘경험’에서 비롯된 체계적인 운영 시스템이다. 모그룹의 인사가 구단 수뇌부로 오는 대부분의 스포츠 구단들과 달리 베어스는 내부 구성원이 승진해 팀 전체를 이끈다. 구단 내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단기, 장기계획을 짜다 보니 성적에 기복이 많지 않다.
일례로 야구 선수 출신의 김태룡 단장은 1990년 OB 베어스에서 구단 일을 시작해 매니저, 운영팀장, 홍보팀장 등을 두루 거쳤다. 각 부문 팀장들 또한 입사 때부터 계속 야구단에만 있던 사람들이다.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들로 일련의 사태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시즌을 이어간다. 김현수(LG), 민병헌(롯데), 양의지(NC) 등 팀 주축 선수들이 FA(자유계약)로 이적하는 상황에서도 베어스가 굳건한 이유는 이렇듯 선제적 대응이 가능하도록 베테랑 베어스 맨이 구축한 시스템 영향이 크다.
OB팬이던 지인은 지금 두산팬이 됐다. 그의 아들 또한 베어스 팬이 됐다. 과거가 모여 현재의 베어스를 만들었고 그 현재가 미래의 베어스를 만들어간다. 팬도, 팀도 그렇다. ‘뚝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