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귀국한 지 보름이 지났다. 2주 격리를 했고 코로나19 검사도 두 차례 받았다. 귀국 직후에 하고 격리 기간 동안 목이 좀 아파서 자발적으로 재검사에도 응했다. 두 번 모두 다행히 음성이었다. 귀국 준비와 정리로 피곤이 쌓여 편도가 조금 부었던 듯하다.
1년, 그 사이 한국은 달라졌다. 아니, 전 세계가 낯선 상황에 직면해 있으니까 한국만 예외일 수는 없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타인은 잠재적 보균자가 됐고 피해야 할 대상이 됐다. 백신이나 치료제가 없는 상태에서 마스크만 한 방어 기제도 없다. ‘마스크는 아픈 사람이 쓰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한 미국, 영국 등 서양에서는 기초 방역도 이뤄지지 않으니 연일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고. “한국에 가면 2주 격리를 해야 한다”라고 했을 때 그 이유를 묻는 미국인이 많았던 것을 보면 바이러스에 대한 이해도 또한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영어공부를 도와준 제임스는 “왜 귀국 뒤 코로나19 음성 판정을 받았는데 격리 생활을 이어가느냐”라고 묻기도 했다.
테이크아웃만 가능했던 유명 아이스크림 가게.
사실 돌아보면 미국도 나름 바이러스 방어에 적극적이었다. 주마다, 혹은 시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내가 살던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에서는 식당 내 식사가 전부 금지됐다. 커피숍이나 아이스크림 가게도 테이크아웃만 가능했다. 미용실이나 헬스클럽, 실내 체육관은 다 문을 닫았다. 극장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문 닫힌 극장.
한동안은 공원 놀이터에도 범죄 현장에서나 볼 법한 노란 줄이 쳐져 있기도 했다. 7월 중순 귀국 전까지 아이들의 소원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것'이었다. 폐쇄된 은행 지점도 많아서 현금지급기를 찾아서 먼 곳까지 가야만 했다. 문을 닫은 가게도 많았고 현금 거래가 제한된 곳도 있었다. 행여 지폐에 묻었을 바이러스를 경계하는 것이었다. 계산대마다 투명 플라스틱 장벽이 세워졌고 카드 계산기에도 비닐이 덮여 있었다. 렌터카 업체 등은 모든 업무를 바깥에서 했다.
카페에 둘러앉아 공부를 하거나 수다를 떠는 모습은 지난 3월 이후 내가 살던 미국 동네에서는 사라졌다. 마트 바깥에서 줄을 서는 것도 일상이었다. 출입 제한 인원이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2m 간격으로 표시된 X 위에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마트 내에서는 아예 칸마다 일방통행 표시가 돼 있기도 했다. ‘ONE WAY’, ‘WRONG WAY’ 식으로.
거리두기 표시를 해둔 약국. 고객은 파란 선 안에 서서 기다려야만 한다.
버거킹 등 패스트푸드점의 매장 내 식사는 거의 금지됐다. 점심시간 2시간 정도만 오픈하는 곳도 많았다. 손과 손의 접촉을 줄이기 위해 현금을 받으면 잔돈은 컵에 담아서 주기도 했다. 리필이 가능했던 음료기계는 아예 폐쇄해 버렸다. 때문에 코로나19 확산 뒤 폐점하는 패스트푸드점이 많기도 했다. 워터파크는 아직 개장조차 못하고 있다. 디즈니월드나 유니버셜을 제외한 중소형 놀이공원은 3월 중순 이후 지금껏 개장 소식을 듣지 못했다.
코로나19 환자에 대한 대응도 달랐다. 무료 검진소가 생기기는 했으나 양성 판정을 받더라도 곧바로 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집 격리가 우선이었다. 타이레놀 등으로 열을 잡고 상태가심각해지면 병원에 입원시키는 식이었다. 때문에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은 듯했다. 급작스럽게 악화되면 손 쓸 방법이 없었다. 미국은 평상시에도 ‘입원 치료’를 우선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병상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식당도 열었고, 헬스클럽을 비롯해 미용실도 열었다. 극장에서는 영화가 상영중이고 공공놀이터도 물론 개방돼 있다. 격리 기간 11층 아파트 바깥을 바라보다가 다른 빌딩 옥상 축구 연습실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을 보며 묘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미국에선 모든 단체 운동이 금지됐었다. 딸의 소프트볼 연습과 리그 참여도 그래서 취소됐다. 여름 캠프도 열리지 않아 환불을 받았다.
여러 아이들이 함께 모여 노는 것에 얼굴을 찌푸리는 지역 주민도 있었다. 코로나19가 앗아간 아이들의 추억은 얼마나 많을까. 아이들은 3월 중순부터 6월 중순 방학을 할 때까지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한국은 그래도 1주일에 한 번은 학교에 갈 수 있었다는데. 다행히 아이들은 떠나기 직전 친구들과 함께 1시간 넘게 숲 속에서 뛰어놀면서 미국에서의 마지막 추억을 공유했다. 미국인 엄마와 그때 나눈 대화는 “아이들은 함께 뛰어놀아야 한다”였다.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던 6피트 거리두기 표시.
마트 상황을 봐도 미국과 한국은 차이가 있다. 한국은 조금 더 자유롭다. 마트에 들어갈 때 제지하는 이는 없다. 다른 사람들과 쇼핑 동선이 겹치는 일도 허다하다. 커피숍이나 카페에도 사람들이 넘쳐난다. 2m 거리두기 표시도 없고 앉을 수 없는 테이블의 의자를 올려놓고 줄로 묶어놓은 곳도 없다. 사람들은 어깨를 부딪치면서 빽빽하게 계산대 앞에 줄을 선다. 패스트푸드 점 이용도 예전과 달라진 것은 없다. 교보문고 등 서점에도 사람들이 많다. 미국보다 제한은 덜한데 코로나19 확진자가 상대적으로 아주 적은 것은 역시나 마스크의 힘인 것 같다.
오늘 다시 밖으로 나갔다. 거리의 사람들 모두 예외없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 확산 직후부터 마스크 쓰기를 권장했으면 아마 미국 확진자 수는 지금의 10분의 1 수준 이하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독감 같은 것이라면서 무증상자를 간과해버린 안일함이 비극으로 이어진다. 4일 현재 미국 내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480만명, 사망자는 15만8000명에 이른다. 현재도 500~1000명 가량의 사망자가 매일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일부 주에서는 마스크 착용 의무 없이 학교를 열고 있고 마스크 착용 반대 시위도 계속된다. 진짜 이해할 수 없는 미국이라는 나라다.
코로나19를 전후로 마스크는 아마 우리 삶의 일부가 될 것 같다. 일견 서글퍼지는 면도 있다. 도통 사람들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어서다. 아니, 내 기분대로 사람들의 감정을 추측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헬로 키티에게 입이 없는 이유가 보는 이의 감정을 투영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던가. 뜬금없이 ‘조커에 입이 없었다면 어찌 됐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긴다. 서양인들이 마스크를 거부하는 게 이런 이유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도 해본다. 마스크는 대인 관계에서 또 하나의 장벽이 될 테니까. 감정을 가리고 사람을 접촉하니.
다수 무증상 환자의 존재로 상대방에게 큰 물음표를 달고 접근해야만 하는 시대. 가족 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면서 집, 혹은 차 안에서만 자유롭게 마스크를 벗고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시대. 바깥 외출을 위해 주섬주섬 마스크를 꺼내 쓰면서 ‘마스크를 벗는 날이 진짜 인간관계 회복의 날이 되겠구나’라고 생각한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