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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Mar 14. 2019

야구는 청춘이다

프롤로그 : 그럼에도 야구인 이유

20년 묵은 일기장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를 아우르는 세월의 눅눅함이 배어 있다. 일기장 안에는 ‘누가 미워 죽겠다’든가 ‘왜 삶은 이리도 짜증 나는가’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기장 한쪽에는 그날의 프로야구 결과가 촘촘히 적혀 있다. 조잡한 글씨로 ‘△△△가 홈런을 쳐서 좋다’ 혹은 ‘○○○ 파이팅!’ 식의 코멘트도 달려 있다. 제주도 소녀는 만화를 보고 싶어 하는 여동생의 간절한 눈망울을 애써 외면하면서 야구를 시청했고, ‘크면 꼭 저 야구장에 가 볼 거야’라는 꿈을 키웠다. 대학 시절 잠실야구장 외야석에 홀로 앉아서 들이켰던 캔맥주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누군가 물었다. ‘야구가 왜 좋냐’고. 어린 시절에는 몰입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는 게 좋았다. 가슴이 쿵쾅쿵쾅 대는 긴장감이 있어 좋았다. 뒤지고 있더라도 막판에는 역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어 좋았다. 9회말 2사까지 시계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게 좋았다. 꼴찌팀도 1등을 이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저 온갖 확률 속에 점수를 내기 위한 선수들의 치열한 몸짓을 바라보며 즐기면 되는 거였다.

 머리가 굵어진 뒤 야구 현장을 누비면서는 선수들의 땀이 좋았다. 선수들은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수만 번 공을 던지고, 수천 번 방망이를 휘두른다. 그런 과정에서 팔은 휘어지고 어깨·무릎인대가 너덜너덜해지기도 한다. 건장한 청년처럼 보이지만,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속병을 앓는 선수들이 많다. 명포수로 이름을 날린 박경완의 경우는 지금도 밤마다 고통에 시달리며 하루 2~3알씩 진통제를 먹는다. 야구는 평생 안고 갈 생채기를 남긴다. 자신의 몸과 싸우는 그들의 정신력에 때론 존경심이 생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야구처럼 온갖 감정이 뒤엉키는 스포츠도 없다. 중간에 대타로 바뀌지 않는 한 최소 3차례는 돌아오는 타석에서 타자가 한 번만은 쳐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못 쳤을 때는 ‘다음번에는 잘할 거야’라는 기대감을 품게 된다. 마지막까지 삼진으로 돌아설 때는 실망감에 ‘다신 응원 안 할 거야’ 다짐하면서도 기어이 다음날에는 또다시 그 선수와 팀을 응원하게 된다. 가까운 지인에게 실망하면 며칠, 몇 달은 가건만 야구팀만은, 야구 선수만은 왜 그리 쉽게 용서하고 믿음을 갖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저 ‘그게 야구야’라고 되뇔 뿐이다.

 나의 머릿속 추억 저장소에는 1994년 한국시리즈 1차전 때 김선진(LG)이 연장 11회말 끝내기 홈런을 쳤을 당시 선생님 몰래 이어폰을 꽂고 야구 중계를 들으며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내가 있고, 1995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송구홍(LG)이 황당한 실책을 할 때 붕어빵을 사면서 가게 안 작은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내가 있다. 그리고 2005년 프로야구 개막일에 남편과 비밀 연애를 시작하면서 그를 보기 위해 일부러 수원 야구장을 찾았던 내가 있다. 그렇다. 나에게 야구는 청춘이고, 그 시대의 추억이다.


 누군가 “야구가 왜 좋냐”라고 물으면 나는 “그냥 좋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금사빠’는 아니었다. 다만 야구는 내게 스며들었고 어느 순간 삶의 일부분이 됐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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