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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May 30. 2019

'착한이'의 처음과 끝, 시리다

박한이의 데뷔 시즌과 마지막 시즌

그의 등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깔끔하게 다림질된 정장. 1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박한이”라는 이름이 불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증발했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그의 눈가가 벌갰다. 주위의 누군가 속삭였다.


“울었나 보다.”


2001년 10월31일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2001 프로야구 시상식장 분위기는 묘했다. 최우수선수(MVP) 뿐만 아니라 최우수 신인선수 투표 모두 그랬다.


우선 최우수 신인선수 후보는 모두 3명이었다. 강동우와 함께 테이블 세터를 이루며 삼성의 정규리그 1위에 보탬이 된 박한이를 비롯해 5월 중순 팀 주축 타자 장종훈의 부상을 틈타 주전으로 발돋움한 김태균(한화), 그리고 빠른 주력으로 도루 3위에 오른 김주찬(롯데)이 그 후보였다.

2002 프로야구 연감 갈무리.

1차 투표에선 김태균이 41표, 박한이가 39표를 받았다. 투표권이 있는 기자들(사실 MVP 및 신인상 기자단 투표는 기자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각 사의 의중이 반영된다. 예를 들어 각 사당 5표, 3표 등의 표결권이 있고 이를 소속 기자들이 상의해 표를 배분하는 식이다)은 고졸 신인으로 20홈런을 때려낸 김태균에게 더 후한 점수를 줬다. 규정타석에 미달(88경기 출전, 245타수)한 게 흠이었으나  ‘고졸 20홈런’에 방점이 찍혔다. 성적은 타율 0.335, OPS 1.085, 82안타, 54타점.


 김태균과 비교해 박한이는 시즌 133경기 중 130경기를 잔부상 없이 꾸준하게 출전했다.  2001시즌동안 130경기 이상을 소화한 선수는 박한이를 포함해 8개 구단 전체 9명뿐이었다. 신인 선수로 세 자릿수 안타(117개)도 때려냈다. 성적은 타율 0.279, 13홈런 17도루 77득점. 야구장 안팎에서 박한이의 신인상 수상을 예상했던 이유였다.


하지만 2차투표에서도 박한이는 김태균에 뒤졌다. 36 대 26. 1차투표 때보다도 표 차는 더 벌어졌다. 당시 김태균은 일본 고베에서 열린 4개국 친선대회 참가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고 아버지 김종대 씨가 대리 수상했다. 김태균의 신인왕 수상이 아주 유력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일생에 한 번밖에 기회가 없는 신인왕이기 때문이다. ‘김태균’ 이름 석자가 불리자 박한이는 눈물을 글썽였다.

2002 프로야구 연감 갈무리.

전통적으로 기자단 투표에서 유리한 쪽은 ‘홈런을 많이 친 선수’였다. 최우수선수(MVP) 투표에서도 당시 홈런왕(39개)에 오른 이승엽(삼성)이 선정된 것만 봐도 그렇다. 이승엽은 당시 다승 1위(15승), 평균자책 2위(3,12), 승률 1위(0.714), 구원 1위(32세이브포인트)의 신윤호(LG)와 경쟁했는데 1차 투표(33-35)에서 뒤지고도 2차 투표(33-29)에서 역전을 했다. 보통 1차 투표는 지역 언론사까지 하게 되지만 2차 투표는 현장에 있는 언론사만 투표하게 된다. 때문에 당시 신인상 및 MVP 투표 유효표는 1차 86표, 2차 62표였다.


 선발, 구원을 오가면서 혹사 논란 속에 시즌 144⅓이닝을 역투하며 역대 최고 성적을 낸 ‘마당쇠’ 신윤호의 입장에서는 조금 섭섭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이승엽이 2001년 때려낸 39홈런은 99년에 기록한 54홈런과 비교해 한참 모자란 수준이었다. 그래도 ‘홈런왕’ 메리트가 MVP 투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MVP나 신인상에서 최후의 승자는 ‘홈런’이었던 셈이다. 음악 빠르기로 치면, 라르고(느리고 폭넓게)보다는 비바체(빠르고 경쾌하게)가 투표에서 위력을 발휘했다고 할까.  하긴 우리 삶에서도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눈에 잘 띄지 않으니까. 뚜벅이에 관심을 주는 집단이 있던가.


5월26일 키움전 9회말 역전 2타점 끝내기 2루타가 박한이의 마지막 현역 모습이 됐다. 삼성 라이온즈 제공  

2001년 프로야구 시상식을 떠올린 이유는 박한이 때문이다. 박한이는 최근 음주 다음날 숙취로 인한 운전 때문에 사고를 냈고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다. 아쉬웠던 데뷔만큼 아쉬운, 더 나아가면 조금은 황당하고 어이없는 퇴장이다. 박한이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어떤 이유에서건 음주운전(혹은 숙취운전이라도)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다. 다만 안타까울 따름이다. 같이 출발선에 섰던 그 어느 누구보다 6개월 내내 꾸준했음에도 신인왕 투표에서 외면받았고, 또 19년 원 클럽 맨으로 후배들에게 계속 모범을 보이며 '착한이'로 불렸으나 한 순간 판단 실수로 ‘음주 운전자’라는 주홍글씨가 평생 새겨지게 됐다.


열심히 하더라고 때로는 한없이 잔인한. 야구, 참 인생  같다.  


덧. 박한이는 2001년 일구상 시상식에서 유망 선수상을 받았다. 프로야구 원로들의 선택은 꾸준함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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