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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Aug 14. 2019

22살, 22년 그리고 22살

어제의 기록 #1

환율이 출렁인다. 미국 온 지 이틀 만이다. 미국, 중국 간 무역 전쟁이 심화되는 모양이다. 신흥 화폐 가치가 급락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 우린 ‘고래’라 생각하고 싶지만 우린 ‘새우’다. 언제인들 안 그랬을까.

 22년 전 그때도 이랬다. 22살의 그 해, 나는 영국 어학연수를 갔다. 21살의 시간을 거의 통째로 받쳐 만든 돈을 종잣돈 삼아 떠난 연수였다.


 무슨 일이든 나는 충동적이었다. 당시 학교 근처 커피숍 아르바이트 도중 외국인 교수의 영어 주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의 화신’이 됐다. 매주 금요일 밤 12시의 혼맥은 나의 작은 사치였다. 1주일 동안 수고 많았다는 위로 같은 것. 22년이 흐른 지금 미국 연수를 결심한 것도 충동에 가까웠다. 현실 도피에 가깝다고 해야 할 듯하다. 열정이 식은 삶은 여기저기 긁힘이 있는 CD 같다. 이젠 그 CD마저 필요 없는 시기가 됐지만.


 생애 처음 국제선을 탔던 그 해를 4개의 숫자로 표현하면 ‘1997’이었다. 그렇다. IMF가 터지기 3개월 전 나는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파운드 당 1400~1500원이던 환율이 2800~3000원까지 오르는 것을 현지에서 직접 경험했다. 출국 전 6개월의 하숙비와 원비를 한꺼번에 지불했던 터라 환율 폭탄의 직격탄은 피해 간 것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한국으로 전화할 때마다 부모님은 “금을 다 내놨다”거나 “기업들 다 망해간다” 식의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엄마는 “우리야 농사짓는 사람이니 괜찮은데 회사 다니는 사람들 어쩌지”라고 걱정하셨다. 늘 그랬던 것 같다. 엄마는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셨다.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밖을 바라보면 하늘은 늘 붉었던 것 같다. 혹은 붉은 기억만 기억 속에 새겨졌거나.


 22살. 인생을 설계하기 좋은 때였다. 스포츠 기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것도 그때였다. 엄마, 아빠도 나름의 전환기를 맞은 때였다.  


 엄마는 22살에 오빠를 임신했다. 결혼 1년 만에 예비 부모가 됐다. 요즘 같으면 첫 임신이라고 호들갑을 떨 만도 했겠지만 엄마는 임신 기간 내내 일만 하셨다. 배가 조금씩 불러오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줄곧 시내 식당에서 일을 했던 아빠는 가끔씩 엄마가 계신 시골로 왔다. 지금은 자동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당시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쉽지 않았다. 지금으로 치면 주말부부였던 셈이다.


 그래서 엄마는 주인집 바깥방에서 혼자 지내는 일이 많았다. 새벽이면 눈을 떠 아침을 먹고 밭에 나가 종일 일을 했다. 점심은 종종 굶었다. 점심 식사값이 아까웠다고 했다. 밭일을 끝내고 집으로 오면 그제야 허기진 배를 달랬다. 입덧 같은 것은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아빠는 식당에서, 엄마는 밭에서 그렇게 ‘예비 부모’의 시간을 보냈다. 젊은 부부는 빚을 내 산 땅의 원금과 이자를 갚아야 했다. 오빠가 태어나기 몇 시간 전에도 엄마는 오전에 보리밭에서 일을 했다. 만삭의 엄마가 보리밭에 쭈그려 앉아 김을 매는 모습을 가끔 상상해 보고는 한다. 엄마는 “옛날에는 모두 그렇게 살았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우리 동네 옆집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엄마보다 한 살 아래인 아빠는 22살에 처음 ‘아빠’의 위치에 섰다. 당신께서는 살아생전 한 번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아빠’란 존재가 됐다. 아빠와 비슷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한 번도 ‘아빠’라는 말을 못 해 본 게 한이 된다”라고 하시지만 과묵한 아빠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신다. 어쩌면 '아빠'란 단어는 차마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아버지, 즉 나의 할아버지는 1948년 12월, 차가운 구덩이 안에서 죽창에 찔렸다. 그의 나이, 22살. 아빠가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나는 지금 할아버지 나이 2배의 삶을 관통해 지나가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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