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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Aug 16. 2019

소풍 도시락, 기억을 품다

사랑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

첫째가 현장 학습을 간다. 도시락이 필요하다. 주변에서는 맞춤 도시락을 신청한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도시락을 싸기로 결심한다. 일종의 약속이다. 평상시 음식은 잘 못해줘도 아이들 도시락은 꼭 내 손으로 싸주겠다는 나와의 다짐. 그래 봐야 1년에 2~3번 정도다.  


요즘은 학교마다 급식이 있지만 내가 학교를 다닐 때에는 늘 도시락을 싸고 다녔다. 반찬은 늘 콩자반이나 멸치볶음 혹은 소시지나 계란말이였다. 콩자반이나 멸치볶음은 한 번 만들면 1주일은 거뜬해서 늘 반찬 0순위였다. 진미채도 비슷하다. 돌이켜 보면 아이들 도시락 반찬은 대게 비슷했던 듯하다.


 고3 자취 시절에는 언니와 엄마가 번갈아가면서 도시락을 쌌다. 1학기 때는 마침 육지(제주도에서는 섬 밖을 육지라고 부른다) 대학을 휴학하고 내려온 언니가 책임졌고 2학기 때는 엄마가 시골집과 내 자취방을 오갔다. 부모님은 도시락 반찬거리를 사라고 1주일에 5천원 정도를 주셨는데 그 돈으로 언니와 나는 당시 한참 유행하던 노래방에 가고는 했다. 도시락 반찬은 엄마가 미리 만들어 주신 콩자반이나 멸치볶음이면 충분했다. 내 입맛이 까다로운 것도 아니었고.


 언니가 복학을 하면서 2학기 때는 엄마가 내 도시락을 담당했다. 엄마는 과수원 일을 끝내고 밤늦게 버스로 내  시내 자취방으로 와서 주무신 뒤 내 아침 식사와 따뜻한 도시락을 준비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시골집으로 가셨다.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는 멸치를 볶고 계란말이를 만들면서 그렇게 매일 도시락을 싸주셨다. 맹장 수술 등을 이유로 수능을 망쳤을 때 차마 엄마 얼굴을 못 보고 엉엉 눈물을 쏟은 것도 이런 엄마의 수고 때문이었다.


 어렸을 적 소풍 도시락은 늘 아빠의 몫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아빠는 시내로 나가 더부살이를 하면서 일식집에서 일을 하셨는데, 이런 경험으로 음식 솜씨가 오히려 엄마보다 나았다. 아빠는 소풍날이 다가오면 정성스레 김밥을 싸주시고는 했다. 아빠 덕에 1980년대에 이미 우리는 계란말이 김밥이나 누드 김밥을 경험했다. 아빠 곁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언제 김밥이 완성될까 지켜보던 우리 4남매의 모습이란.  계란말이 김밥, 혹은 누드김밥을 볼 때마다 나는 부엌에 쪼그려 앉아 김밥을 마시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련한 그 시절의 색채로.


 사실 아빠나 엄마는 단 한 번도 ‘아빠의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이다. 할아버지 두 분 모두 4.3 사건에 연루돼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친할아버지는 아빠가 할머니 뱃속에 있을 때, 외할아버지 또한 엄마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4.3 사건으로 말미암아 형무소에 갇혀 계시다가 6.25 때 실종되셨다. 한쪽 사랑이 결핍된 상태에서 자란 두 분이지만 자식에 있어서만큼은 정말 끔찍하셨다. 그 사랑이 응집된 것이 바로 도시락이었다.


 어쩌면 가난은 해도 자식들은 절대 굶기지 않겠다는 부모님의 의지가 도시락에 투영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아버지의 부재 속에 누구보다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터다. 성인이 된 뒤에도 점심을 굶어가면서 밤낮없이  밭일을 하시고는 했다.  하지만 자식들의 도시락은 늘 챙기셨다. 덕분에 우리 4남매는 늘 따뜻한 도시락을 먹으면서 학교에 다녔고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우리가 살던 시골 동네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우리 집 빼고 단 한 집만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냈으니까.       

 나 또한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한 뒤 야외 학습 등을 나가면 손수 도시락을 쌌다. 김밥을 기본으로 하고 카레가루를 이용해 노란색 메추리알 병아리를 탄생시켰고 까만 통깨와 치즈를 눈으로 해서 소시지 문어 아저씨도 그럴듯하게 만들어냈다. 맨 처음에는 통깨 붙은 치즈가 소시지에서 자꾸 떨어져서 꽤나 고생했었다. 지금은 1시간이면 싸는 것을 처음에는 3시간이나 걸리고는 했다.  야근을 하고 돌아와 2시간만 자더라도 아이들의 도시락은 꼭 내 두 손으로 쌌다. 함께 사는 시어머니가 “아이고, 엄마가 이런 걸 아이들이 알아야 하는데”라면서 안쓰럽게 생각하셨지만 나는 괜찮았다. 부모님에게 배운 사랑 표현의 방식 중 하나가 도시락이었으니까.


 아이들이 커서 도시락 싸는 엄마의 모습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내가 엄마, 아빠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처럼. 그 맛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콩자반을 도시락 반찬 통에 넣고, 김밥을 돌돌돌 말던 그 모습은 내 기억 회로에서 늘 행복한 순간으로 남아 있다. 콩자반과 멸치볶음, 김밥은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도시락은, 혹은 음식은 기억의 언어인지도 모르겠다. 아련한 추억을 품은. 그게 슬픈 일이든, 좋은 일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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