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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희 Jan 03. 2020

조커는 왜 매일 우편함을 열었을까

외로움, 그리고 기다림

20년 회사 생활에 잠깐 포즈 버튼을 누르고 미국 '늦은' 연수를 간 뒤 맨 처음 본 영화는 <조커>였다. 혼자서 큰 영화관에 앉아 팝콘을 씹으면서 봤다. 화요일마다 티켓 할인이 되는 터라 영화관 시설은 CGV 골드클래스 급이었는데 가격은 8달러 정도. 푹신한 가죽 소파에 개인 탁자까지. 미국 영화관 첫 경험치고는 꽤 괜찮은 호사였다.


그나마 듣는 데는 자신이 있어서 덜 긴장한 상태로 영화를 봤다. 아니 들으면서 봤다. <조커> 영화평을 익히 블로그 등을 통해 읽고 온 터라 스토리 이해는 자연스럽게 됐다. 다른 미국인 관객의 감정의 흐름대로 내 몸도 반응한 것을 보니 언어의 장벽이 있었더라도 영화 이해도가 80%는 넘은 것 같다. 망상과 현실 부분도 잘 수긍하면서 따라갔고.


자막 없이 외국 영화를 보면 귀를 쫑긋 세우고 한 장면, 장면에 굉장히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나를 사로잡은 한 장면. 아서가 허름한 자신의 아파트로 올라가기 전 우편함을 여는 장면이었다. 어머니의 성화로 아서는 매일 습관처럼 우편함을 살폈다. 매일 비어 있었고, 그 흔한 고지서 하나 없었다. 하긴 빈민층이라면...


우편함. 영국 어학연수 시절 나는 아서처럼 습관적으로 하숙하고 있던 집의 우편함을 살폈다. 내심  한국에서 오는 편지나 소포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메일이 없던 시대(있기는 했는데 대중적이지는 않았다. 이메일을 쓰려면 어학원 랩을 이용해야 했다)라서, 국제통화료(그게 수신자 부담이었다고 하더라도)는 비싸던 시대라서 가끔씩 지인들이 보내오는 편지나 소포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돌이켜보면, 많이 외로웠고 마음이 허했던 듯하다.


하루는 우편이 도착하는 새벽녘에 살금살금 2층에서 내려와 몰래 우편함을 열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2층으로 올라가고는 했다. 오죽하면 편지를 받는 꿈까지 꿨을까. 이런 나의 외로움은 매주 부모님께 편지를 쓰는 것으로 치환됐다. 나중에 들은 사실은 아버지도 내 편지를 무척이나 기다렸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서는 우편함에 대한 그런 기대감이나 실망감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미국이라는 낯선 땅. 출장 등으로만 머무르다가 1년 동안 살아야만 하는 이곳에서 우편함에 대한 작은 욕망은 되살아났다. 아니, 우편함뿐만 아니라 전자우편으로까지 확대됐다. 우편함을 열 때마다, 휴대폰으로 이메일 상자를 클릭할 때마다 대게는 광고뿐이지만 무언가 기대감이 있다. 실망이 반복되고 반복되지만 그렇다고 실망이 절망을 낳지는 않은 듯하다. 금세 내일의 우편함을 기대하는 것을 보니.


외로운 거구나... 그렇게 나름 정의를 내린다. 다른 사람과 소통이 그리운 것일 수도 있겠다. 어느 순간 돌아보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으니까. 집에 남편 없이 혼자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어른의 대화를 나눌 이가 곁에 없다는 게 더 이 감정을 증폭시켰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곁에는 같은 눈높이의 누군가 있어야만 한다.


오늘도 나는 선물함을 여는 듯한 기대감을 품고 우편함을 연다. 그나마 아서와 달리 고지서라도 있으니 다행인 건가. 투명인간이 아닌 외부와 소통하고 있는 실제 인간이라는 의미일 테니까. 사회적 인간이라는 의미도 될 테고. (아서, 아니 조커는 얼마나 외로웠던 것일까. )

 

2020년 어느 날, 아무 기대 없이 우편함을 열었을 때 팔딱팔딱 숨 쉬는 빨간 편지 봉투가 놓여 있기를. 꾹꾹 눌러쓴 휘갈긴 글씨체에 처음엔 웃겠지만 나중에는 울기를. 차마 디지털화되지 못한 아날로그 인간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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