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R.I.P 나의 10년
올 여름은 지독한 산불때문에 온 도시가 미세먼지로 뒤덮혔었다. 그리고 그 산불은 세계최고의 환경을 자랑하는 우리 동네에 뿌연하늘을 선사했고 미세먼지라는 한 평생 느껴 보지 못한 짜릿한 스릴을 나의 기관지에 선물했었다.
그렇게 미세먼지가 덮힌 하늘을 조금이라도 맑게해줄 비소식이 있던 날이였다.
하루 휴가를 내고 여유를 부리기 위해서 가까이 사는 친한 형님과 커피를 한잔 하고 있었다. 3년 정도의 터울이 있는 형이였지만, 워낙에 격없이 지내던 사이였고, 10년의 해외생활 중 유일하게 맘을 터놓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였다.
'호로록'
커피를 마시며 나의 다음 사진 프로젝트에 대하여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한번이라도 제대로 끝내본 프로젝트가 있기는 했던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입은 계속해서 나불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닐텐데 매번 호응과 함께 반응을 해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뜨거운 커피가 적당히 식을때 까지 신나게 이런 저런 미래 지향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할때 두려움과 함께 갑작스럽게 현타가 찾아 왔다.
그리고 그 생각은 뇌를 거치지 않고 입으로 나왔다.
"형, 그런데 이렇게 10년 가까이 몇번을 같은 걸 했는데도 안되면, 전 재능이 없는 거 아닐까요? 가끔 이제는 손을 놓아야 하는게 아닐까, 정말 내가 재능이 있고 능력이 있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빛나고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 뒤로 우리 둘은 사진과 관련된 별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차를 타고 오면서 곰곰히 생각을 했다.
왜 난 지금까지 이룬 것이 없을까?
생각해 보면 어디 하나 내걸만한 사진도 없었고 자신있게 보여줄 사진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진들이 그냥 그 순간에만 반짝이고 사라지는 성냥들 같다.
집에 돌아와서 컴퓨터를 켜보니 하드의 용량이 얼마 없다고 정리를 하라는 경고창이 떳다. 얼마전에 상태가 좋지 않던 백업 시스템을 처분 한 후 아직까지 백업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드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사진들을 외장하드로 옮겨야만 했고 800기가가 넘는 지난 10년의 기억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용량이 용량인 만큼 전송시간만 4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렇게 적당한 시간 지나 꺼져 있는 모니터를 켜기 위해 마우스를 흔들어 보니 이런 경고 창이 떠 있었다.
'Error 발생 - 복사 실패'
외장하드는 잡히지 않았고 하드에서 사진 폴더는 찾을 수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날라간지도 모르겠다.
잠깐의 맨붕이 왔지만 의외로 반드시 복구해야 한다는 의지는 없었다. 맨탈이 나가버린 뇌에서 엔돌핀이 돌아서 그런건지...희안하게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는 것같았다.
그렇게 나의 이룬것 없던 10년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