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왜 나를 낳았을까

엄마에 관한 글쓰기 2

by 조각보자기

엄마 나이 서른여덟, 나를 낳았다. 오빠를 낳은 지 열여섯 해 만이었다. 뜬금없이 태어났다고 친척들이나 동네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뜬금얘’로 불렸다. 나의 탄생을 이해하기엔 난 너무 어렸다. 그저 엄마가 있고 아빠가 있고 할머니가 있고 오빠가 있어 좋았다.

그러다 학교에 입학해 알게 됐다. 엄마 나이가 보통의 엄마들보다 많다는 것을. 엄마들이 학교에 올 때면 짓궂게 놀리는 남자애가 있었다. “너네 엄마는 왜 할머니냐?” 뭐라고 시원하게 쏘아주고 싶었지만 나 역시 답을 알지 못했다.

단순히 나이로 엄마가 부끄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엄마들과 엄마의 행동을 비교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쓸쓸해졌다. 젊은 엄마들은 세상 물정에 더 밝았고, 자녀의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아이의 생일날 경양식 돈가스 집에서 파티를 열여 줬다. 유행하는 학용품 같은 것도 잊지 않고 사줬다. 아이 친구들이 집에 오면 직접 만든 간식을 대접했다. 자상하게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더 필요한 것 있으면 엄마한테 말해’라고 했다. 나는 그 다정함이 부러웠다.

나도 엄마가 필요할 때 언제든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엄마는 농사일로 바빴고 다소 억척스러웠다. 내게 무엇이 필요한 지 묻지도 않았다. 하필 그런 엄마와 나 사이에 40년에 가까운 나이 차이까지 있으니, 우리가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더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중학생이 되자 처지를 비관하기에 이르렀다. 뮤직뱅크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곧 나오는데, 하필 그때 엄마가 빨리 나와서 경운기에서 고추 가마니 내리라고 소리칠 때면 집구석이 지긋지긋했다. 엄마 시대에 자식은 노동력이었다. 주말에 친구들이 읍내에 나가 놀자고 해도 못자리를 돕거나 농약줄 잡는데 일손을 보태야 해서 갈 수 없었다. 나는 젊은 엄마라면 이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물 셋에 오빠를 낳은 ‘젊은 엄마’는 바닷가로 가족여행도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때 찍은, 내가 없던 시절의 사진을 발견했을 때 어찌나 질투가 일던지.

무엇보다 엄마는 사춘기 예민한 감성을 고려할 만큼 섬세하지 못했다. 첫 월경을 시작했을 때는 ‘아이고, 이 귀찮은 걸 해서 어짠다냐’라며 혀를 찼다. 마치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듯 죄책감이 몰려왔다. 교복은 여기저기서 물려 입었는데 온전한 한 벌이 아니었다. 엄마는 어느 해에는 조끼를, 어느 해에는 치마를 얻어 왔다. 해마다 미세하게 달라지는 원단 때문에 내 교복은 늘 짝짝이였다. 그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엄마는 조끼와 치마의 색이 다르다는 것을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착한 딸이었다. 고3 여름방학에는 EBS 수능 강의 테이프를 들으며 고추를 땄다. 마음속에서는 전하지 못한 서운한 마음들이 쌓여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어?’라는 질문이 피어났지만, 그 질문에 대한 내 답은 언제나 ‘그러니까 내가 잘 해야지’였다. 엄마가 뜬금없이 태어난 나 때문에 고생하니까, 나는 뜬금없이 태어나 엄마를 고생시키고 있으니까.

오은영 박사의 칼럼을 읽다가 ‘허구의 독립성’이라는 말을 알게 됐다. 어릴 적 인간의 의존욕구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마음에는 상처가 있으면서 겉으로만 독립적으로 보인다는 개념이다. 그러니 아이가 아이답게 떼 부리고 조르고 철없어야 건강한데, 의젓하고 말썽 부리지 않는 자녀가 있다면 그 아이의 내면에는 의존적 욕구를 표현해 보지 못해 생긴 구멍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의젓하다, 착하다, 순하다’라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라고 한다. 부모를 실망시킬까봐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부모의 처지를 걱정하게 되는 것이다.

‘뭐야, 내 얘기잖아’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의젓하고 독립적이었던 착한 딸은 결국 곪은 것이 터졌고, 뒤늦게 상처를 돌보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모든 부모는 미숙하다. 이 사실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도 부모는 생애 처음이었다. 그러니 실수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이해해 본다. 나 역시 ‘엄마에게 잘 해야지’ 다짐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라고 소리친 날이 많았다. 아마 엄마도 상처받았겠지. 늘 다짐만큼 잘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엄마라고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다짐하지 않았을 리 없다.

엄마 손을 잡고 갔던 국민학교 입학식이 떠오른다. 나는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던 터라 학교가 낯설었고, 엄마는 다른 엄마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교실 뒤에서 나를 기다렸다. 첫 수업은 엄마 얼굴 그리기였다. 선생님이 ‘연진이는 엄마가 여기 계시니 좋겠네’라고 내 이름을 불러줬다. 특별한 사람이 된 듯 뿌듯한 마음에 열심히 뒤를 돌아보며 엄마 얼굴을 그렸다. 엄마는 나를 보고 미소짓고 있었다. 다시 학부모가 된 엄마도 나처럼 가슴이 벅차 오른 순간이었을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양육자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주었다. 바쁜 와중에도 운동회에 와서 달리기를 해 주었고, 급식 당번일 때도 와 주었다. 장기자랑에 필요한 옷을 사주었고, 서울에서 열리는 콘서트에도 보내줬다. 의무였거나 내가 졸랐던 일만 해 준 것이 아니다. 엄마가 먼저 알고 컴퓨터를 사주고 학원도 가라고 한 덕에 나는 시골에서도 세상과 만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멀리 간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 입학 전날, 3시간 거리의 학교에 데려다 주는 동안 계속 우는 엄마를 보고야 그 서운한 마음을 짐작했을 뿐이다. 서울의 사립대에 가게 됐을 때 엄마는 더 늙어 있었다. 하지만 자식이 많이 배우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젊은 엄마들과 똑같았다.

엄마는 왜 나를 낳았을까. 그 대답이 축복일 때가 있었고 절망일 때가 있었다. 지금은 질문하는 대신 엄마와 나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아마 내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의 자식이었다고 해도 나는 사랑받고 상처받았을 것이다.

부모 자식이 서로를 선택할 수는 없다. 다만 어른이 된 뒤 우리는 자기 부모를 좋아할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나는 비교적 엄마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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