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 관한 글쓰기 3
엄마는 엄마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외할머니를 뵌 기억이 없다. 어릴적 엄마에게 물으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라는 무심한 답변이 돌아왔다. 사고 경위나 엄마 본인의 심정 같은 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나라면 엄마 아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엄마는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엄마가 왜 엄마가 없는지 정확히 알게 된 건 내가 좀 더 큰 뒤였다. 엄마는 6.25 전쟁으로 부모를 여의었다. 엄마가 세 살 되던 해였다. 그러고 보니 친할아버지도 6.25 때 돌아가셨다. 나의 부모님이 역사 속 비극의 당사자라는 게 슬펐다. 그 인생들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엄마는 덤덤했다.
엄마가 어떻게 엄마를 잃었는지, 그리고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이번에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외가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던 엄마에게 글을 쓴다는 구실로 자세히 물었다.
“나도 인자 기억이 가물가물하다야. 전쟁 나서 마을에 빨갱인지 군인인지, 아니 경찰이었으까, 모르겄다. 암튼 그런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우리집에 불 지르고, 아빠는 폴새 죽이고 그랬다든만. 그라고 동네 사람들 모태 놓고 뜬금없이 ‘죄가 없는 사람은 자수를 하면 살려준다’고 했다냐. 안 죽인다고. 그랑께 우리 할머니랑 엄마가 자수한다고 갔는디 그 길로 안 왔댜. 그때 엄마가 나를 업고 있었는디, 사람들이 애기는 두고 가라고 했다든만. 그래서 엄마가 나를 뚝 떼어 놓고 갔대. 그라고는 안 돌아왔제. 집안 어른들이 ‘아야, 너도 꼭 죽어불고 이 땅에 없을텐디’ 그런 말을 했어. 뭐시 진짠지는 나는 모르제. 어른들 말이라 내가 다 이해를 못 했겄고. 긍께, 말하자믄 이것이 내 운명 아니겄냐.”
엄마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할아버지는 한순간에 외아들과 아내, 며느리를 잃은 충격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밖으로 나다니며 술에 의지했고, 가세는 점점 기울었다. 엄마는 동네에 있던 큰집, 작은집, 외갓집 등에서 도움을 받다가 여덟 살부터는 할아버지와 재혼한 새할머니 손에서 컸다.
엄마 학력은 성전면에 있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게 전부다. 집안 형편도 어려웠지만 엄마 스스로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중학교에 가는 대신 집에서 농사일, 집안일, 누에치는 일 등을 도왔다. 뒤늦게 태어난 엄마의 작은 아버지와 고모를 업어 키운 이도 어린 엄마였다. 십 대 때는 살림하고 육아하는 것 말고는 별 것 없는 일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스물두 살에 아빠와 중매로 결혼했고,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여기까지가 1947년에 태어난 엄마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엄마의 회고 속에는 하고 싶었던 일이나 꿈 같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1986년에 태어난 나는 꿈이 있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시대를 지났다. 더이상 여자라는 성별이 학업을 그만 둘 이유가 못 됐고, 중학교도 무상 의무교육 대상이었다. 어릴 적부터 선생님은 내게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었고, 열심히 공부하면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도전해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가정이 생긴 엄마는 ‘잘 살아보세’를 외치는 새마을운동 교육을 충실히 받들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을 챙기고, 자식을 키우면서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으로 무장한 농촌의 일꾼이었다. 다만 엄마는 동네 아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억척스러운 면이 있었다. 시골에서도 비 오는 날에는 으레 일손을 놓고 쉬기 마련인데 엄마는 비를 맞아가면서도 일을 했다. 몸이 아플 때도 병원에 가는 대신 밭에 갔다. 자신을 꾸미거나 자신을 위해 물건을 사지도 않았다. 마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시에 등장하는 엄마처럼 말이다.
덕분에 나는 엄마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얘기를 듣고 자란 나는, 엄마 인생에 엄마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닌지 늘 안타까웠다.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외면한 사람 같았다. 아니, 그것을 탐구해 볼 여유나 성찰의 기회가 없었겠지. 엄마가 ‘그래도 되는’ 삶을 살아온 데는, 아무도 엄마에게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라고 얘기해주지 않은 엄마의 시대 탓이 크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엄마에게는 그런 말을 해 줄 엄마라는 존재도 없었잖아. 저 시 속의 엄마에겐 엄마가 있었는데, 우리 엄마에게는 엄마가 없었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은 뒤 오랫동안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엄마는 엄마 안 보고 싶어? 살면서 힘들 때 생각나지 않았어?”
“나는 부모한테 좋다 싫다할 감정도, 정도 하나 없는디야. 생각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대신에 나는 힘들 때 자식 생각함시로 전뎠다. 느그들 생각하믄 밭을 그라고 매도 손뿌리가 아픈지도 몰랐제. 나는 부모 덕을 못 봤응께, 내 새끼들한테 만큼은 덕이 되고 싶었어야.”
엄마가 엄마를 그리워할 것이라는 것은 순전히 엄마의 보살핌 아래 자란 내 입장에서의 착각이었다. 힘들 때 엄마에게 전화해 짜증을 부릴 수 있었던 건, 받아 줄 엄마가 있는 나의 호사였다. 엄마에게는 애초에 없던 엄마보다 자식이 삶의 의지이자 위로였다.
엄마가 자식밖에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자식에게 덕이 되고 싶었다는 엄마의 답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마 스물 셋의 엄마에게 오빠는 인생에 처음 생긴 꿈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일 하면서 ‘내 새끼들 생각하믄 더 해야제’하고 뱉었던 엄마의 말은, 나를 짐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엄마의 동력이란 말이었다. 자식이 당신의 행복이란 말이었다.
엄마가 엄마 인생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세운 날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엄마의 시대는 엄마에게 자존감이나 자기애를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인생은, 스스로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을 뿐 충분히 엄마의 것이었다. 엄마는 누구보다 자기 인생의 행복을 위해 성실했던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 마음도 조금 안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