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커리어우먼이다

엄마에 관한 글쓰기 4

by 조각보자기

커리어우먼의 뜻은 다음과 같다. ‘직업을 갖고 있는 여성. 주로 일의 전문성이나 일에 대한 자신감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쓴다’. 엄마는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하다 보니 50년이 넘었다. 종종 본인이 ‘농업대학 못자리과’를 졸업했다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로 일도 손에 익었다. 오피스룩을 입고 모니터 앞에 앉아 본 적은 없지만 우리 엄마도 커리어우먼인 셈이다.

엄마의 커리어는 시집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허울은 좋은데 입사해 보면 그에 못 미치는 회사가 있듯, 엄마의 직장 또한 그러했다. 시집가는 집은 농사지을 땅이 열 댓 마지기 있고, 소도 있고 머슴도 있다 들었다. 풍족하게 살림을 시작할 수 있 을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머슴은 없고 빚만 있었다. 소도 우리 소가 아닌 도짓소였다. 그런 상황에서 엄마는 적당히 일하며 자신의 워라밸을 챙길 수가 없었다.

처음 산 논은 마을 어귀에서 바로 보이는, 잘 정비된 농지였다. 당시는 돈 대신 곡수로 값을 치르는 때였다. 논 한 마지기 값은 나락 23석이었다. 55kg 쌀가마니 두 개를 1석이라 칭하니, 나락 23석은 2,530kg인 셈이다. 그 농지에 논을 총 세 마지기 샀다. 남의 논을 벌며 십 년 만에 이룬 엄마의 성과였다.

엄마는 그런 순간들이 좋았다고 한다. 너른 땅에 많은 농작물, 눈에 보이는 그 결과들이 오졌다. 삼사십 대에 한창 농사를 지을 때는 논이 5,000평, 밭이 2,000평이었던 적도 있단다. 지금 가꾸는 500평의 밭도 힘에 부치는 엄마지만, 엄마에게도 젊음과 패기로 도전하던 시절이 있었구나 싶다.

하지만 엄마는 대농은 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3만 평 이상의 농사를 지으면 대농으로 본다. 우리집에는 애초에 그만한 땅이 없었다. 설령 땅을 마련했다고 해도 엄마는 본인 손으로 일일이 그 넓은 땅의 김을 맸을 사람이다. 엄마는 인력을 사서 쓰면 남는 것이 없다고 철저히 가족의 손으로만 농사지었다.

경운기 외에는 농기계도 사지 않았다. 소로 쟁기질 하고, 손으로 나락을 훑던 엄마에게 값비싼 농기계는 다른 세상 얘기였다. 그렇다고 소농을 지향하며 몸이 감당할 만큼만 농사 지은 것도 아니다. 일찍이 친환경 농업으로 시장을 선점한 농부들도 있지만, 우리 엄마는 그럴 깜냥도 못됐다. 우루과이 라운드나 FTA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하루하루 출근하기도 벅찬 직장인처럼, 엄마도 그저 먹고 살기 바쁜 농부였다.

어릴 적 산비탈의 고구마 밭에 온 가족이 출동해 고구마를 캤던 기억이 난다. 두둑 위로 풍성한 고구마 순을 걷어 내면 분홍빛의 고구마가 줄줄이 딸려 나왔다. 큰 것이 나오면 뿌듯하고, 이상한 모양이 나오면 재밌을 나이였다. 1991년 구매한 신상 경운기에 그날 수확한 고구마를 실었다. 경운기는 해질녘 어스름한 들길 위를 느리게 달렸고, 고구마가 담긴 비료 포대가 몇 개인가 세어 보는 내 마음은 부자가 된 듯 했다.

엄마에게 다시 물어보니 그렇게 지은 고구마 농사로 연 50만 원 정도를 벌었다고 한다. 포대가 경운기 한 가득이었는데, 생각보다는 소박한 액수다. 그런 데서 모은 보너스 같이 귀한 현금으로 엄마는 전기세도 내고, 제사에 쓸 생선도 사고, 자식 학비도 모았을 테지.

엄마는 대게 한밤중까지 일을 했다. 어떤 날은 평소보다 더 늦도록 엄마가 오지 않았다. 아빠와 서재골 들녘으로 엄마를 찾아 나섰다. 불빛 하나 없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나는 엄마가 호랑이에게 잡혀 갔으면 어떡하나 덜컥 겁이 났다. 아빠가 ‘운암댁!’ ‘운암댁!’하고 엄마를 불렀다. 얼마 후 깜깜한 어둠 속에서 엄마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풀을 다 매고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아빠가 ‘징하다, 밭에서 콱 죽어불지 그랬냐’며 엄마에게 화를 냈다. 야근 수당은커녕 인정도 못 받는 고생을 엄마는 사서 했다.

여름이면 엄마는 삐쩍 말랐다. 작은 눈은 빨갰다. 무리하는 날은 어김없이 코피를 흘렸고, 어떤 여름에는 밭에서 쓰러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무리하지 않는 날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 엄마와 농사와 고생은 동의어였다. 농사는 퇴근도 휴일도 없는 일이었다. ‘뻐치다’, ‘징허다’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농사는 하늘이 짓는다'라는 말이 있듯, 태풍 한 번에 허망하게 모든 것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큼의 노력이 있어야 하늘이 도울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엄마는 늦은 밤까지 호미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집에 와서 쇠죽 쓰고, 빨래하고, 밥도 차려야 했으니 엄마의 고생은 아빠의 두 배였다.


이제 나도 직장인이 된 지 10년이 넘었다. 일을 해보니 직업이 생계를 책임지는 성질을 가지는 한 고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게 됐다. 어쩔 수 없는 야근과 잔업이 존재한다. 불안함에 나를 혹사시킬 때가 있고, 풀리지 않는 일은 집까지 가져오기도 한다. 모든 직업인에게 저마다의 고충이 있듯, 엄마의 고생도 그런 맥락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물론 땡볕에 야외 일이 육체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나친 감상은 넣어두기로 했다.

또 농부라고 모두 엄마처럼 일하는 건 아니다. 규모의 경제로 효율을 우선하는 농부도 많고, 소농의 장점을 살려 시간적 여유를 추구하는 농부도 있다. 그러니까, 아빠가 못 미덥다며 본인이 더 억척스럽게 나서고 풀 몇 포기 눈 감아도 되는데 잠을 줄여 기어이 뽑은 것도 다 엄마 개인의 업무 스타일일 뿐이다. 거두는 돈보다 농약 값이 더 든다고 욕해도 이듬해 그 작물을 또 심는 게 엄마가 만든 매뉴얼이었다. 그리고 분명 고생으로 퉁치는 시간 안에는 엄마의 자발적 몰입과 성취감, 보람도 있었을 것이다.

“내 빼딱 빠지게 일해서 이만큼 한 줄 알아라. 오메 오메, 그런 시상 어찌 살았을까. 요새 사람 같으믄 못 살 거여.”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자부심인지 고생담인지 나로서는 당최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징한 세월을 살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농사를 놓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다. 50년 외골수 농부는 오랜만에 딸이 집에 와도 여전히 밭일을 하느라 깜깜무소식이다. 그냥 나는, 나보고 밭에 와서 거들라는 말 안 해서 좋을 뿐. 우리는 이제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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